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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오이] 눈동자 속의 그리움 下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캐리어를 끌고 나무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다급하게 팔을 잡자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새겨진 내 이름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비는 지독하게 땅을 때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그와 나의 긴장한 숨소리가 묻혔다.

 

 "도망가지 마세요.“

 

 "-누가 도망친단 건데. 나는 단지 급한 일이 떠올라서 가려고 했을 뿐이야."

 

 그는 내 손을 털어내 듯이 떨어뜨리곤 젖은 앞머리를 넘겼다. 그리고 힐긋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제 눈 속에도 오이카와 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나요?“

 

 궁금했다. 내 눈동자에도 제대로 그의 이름이 떠올랐을까.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보니 제대로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눈가를 만지다 캐리어에 걸터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대학교는 아직 시험 기간 아닌가요.“

 

 "일찍 끝났어. 마침 훈련 시작 날까지 시간도 남았길래 집에 온 거야. 그러는 토비오 쨩은 지금 한창 봄고 준비할 때 아닌가?“

 

 "며칠 뒤부터 합숙이라 그 전까지는 좀 일찍 끝낸대요. 오늘은 마침 체육관 점검도 해야 한대서 더 일찍 끝났고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초조한 듯이 계속 화면을 켜 답장이 왔는지 확인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도 답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은 메신저 앱을 보던 그는 카메라 앱을 켜더니 자신의 눈동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차색 눈동자 속에 작게 써진 네 글자를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

 

 "휴대폰에 저장돼 있었어요.“

 

 그는 화면을 끄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살펴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그도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중일까. 나도 모르게 손 안의 가방끈을 꾹 쥐었다.

 

 "어렸을 땐, 눈동자에 누군가의 이름이 빨리 새겨지길 바랐어.“

 

 "?“

 

 "근데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제발 이름이 떠오르지 않길 바랐지. 운명이란 걸 별로 안 믿기로 했거든. 내 앞길은 내가 직접 정하고 싶었으니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기분 나쁜 울렁임에 속이 불편했다. 옛날부터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더 짐작 되지 않아 불안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난 운명의 상대 같은 건 안 믿는단 뜻이야. 토비오 쨩.“

 

 그가 나와 반대편에 놓인 골목 어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울렁임은 어느새 가슴을 턱 하고 막는 억울함으로 변해 있었다.

 

 "-그건 오이카와 씨 생각이잖아요.“

 

 그가 살짝 놀란 눈으로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것일까. 그는 눈을 깜빡이다 뭐라 말하려 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다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그 입술을 바라보다 말했다.

 

 "저는 오이카와 씨에게 제 이름이 새겨져서 기뻐요.“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섰다. 그가 캐리어 위에 걸터앉아 있었기에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좀 더 가까이에서 내 이름을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싫어.“

 

 "자세히 보고 싶어요.“

 

 "싫다니까?“

 

 "-왜요?“

 

 "그야-“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익숙한 거부에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서 예의에 어긋난단 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잡고 돌렸다.

 

 "!“

 

 황홀하다. 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걸까.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말랑한 볼도, 그의 눈에 새겨진 내 이름도.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만약. 만약 꿈이라면, 차라리. 왠지 울적해졌다. 그래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붙잡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숨이 얽히는 게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다. 그도 나도 긴장한 걸까. 내뱉는 숨의 간격이 짧았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나. 입술이 맞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란 그는 나를 밀치더니 캐리어에서 일어나 나에게 등을 돌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들리는 이름이 낯선 걸 보니 대학 팀의 멤버인 것 같았다. 문득 아까 츠키시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과연 이 팀을 떠나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 상황이 되는 건 아닐까. 다시 머리가 복잡해져 바닥의 젖은 흙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전화를 끊는 그를 보았다.

 

 “오이카와 씨는 이와이즈미 선배가 없는 새 팀에서도 잘 적응하셨겠죠.”

 

 그가 메시지를 보내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한참을 눈을 마주보았다. 그러다 그가 먼저 눈을 떼곤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라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야.”

 

 "네?”

 

 의외의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러자 그가 그런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누구나 새로운 곳에 처음 가면 다들 힘들어 한다고.”

 

 그는 다시 캐리어에 걸터앉더니 예의 그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오이카와 씨는 대단하니까 금방 팀원들하고 친해졌지만!”

 

 “, .”

 

 내 반응이 떨떠름한 게 느껴졌는지 아님 민망했는지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네가 뭘 두려워하는지는 알겠어, 토비오.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면 성장할 수 없어. 너도 겪어봐서 알잖아?”

 

 1학년 때, 히나타가 더 이상 눈을 감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만약 그 때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단념하고 안정만을 좇았다면 우리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불안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비 그쳤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어느새 그쳐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의 손잡이를 꺼내며 갈 준비를 했다.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정리를 하더니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토비오 쨩, 나중에 또 언젠가 보자.”

 

 아. 이렇게 보낼 순 없었다. 아직 이름에 대한 얘기가 덜 끝났는데. 그래서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저희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잖아요."

 

 “무슨 얘기? 고민상담은 끝난 거 아닌가?”

 

 “이름이요. 저희 눈에 새겨진 이름.”

 

 “그 이야기는 한참 전에 끝났잖아. 나는 운명이고 이름이고 안 믿는다니까?”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놓으라는 듯이 팔을 흔들었지만 나는 더욱 세게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분명히 그는 계속 나를 피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이름에 대해선 묻힐 게 분명했다.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곤 그의 눈에 새겨진 내 이름을 보며 말했다.

  

 “오이카와 씨에게 제 이름이 뜬 이상 어느 정도는 저에게도 제 마음을 전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다시 가까워진 얼굴에 그의 숨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나를 피하는 그의 눈동자를 눈으로 쫓았다. 그가 눈을 굴릴 때마다 조금씩 내 이름의 색이 변하는 게 신기했다. 좀 더 보고 싶단 생각을 했을 뿐이었는데 입술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 감촉이 좋아 살짝 더 다가가 입술을 비벼보았다. 그러자 그가 감전이라도 된 것 마냥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밀쳐내었다. 그리고 입술을 소매로 문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 망할 꼬맹이가-.”

 

 그는 약간 화난 표정이었는데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곤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 좀 누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쓰러진 캐리어를 똑바로 세우곤 다시 손잡이를 잡아끌며 걷기 시작했다.

 

 “오이카-”

 

 내가 다시 그를 붙잡으려고 하자 그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서.”

 

 나는 멍하게 그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이 그의 생일이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급하게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우유빵 몇 개를 샀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쪽으로 달리며 외쳤다.

 

 “잠시만요, 오이카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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