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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오이] 눈동자 속의 그리움 上

*약간 변형된 네임버스 AU

*오이카와 오른쪽 생일 합작 참여 글

 

 

 

 

체육관 창문 너머의 빗소리, 꿉꿉한 공기와 턱 끝까지 차오른 숨, 유독 더 크게 울리는 배구화의 마찰음. 장마도 어느새 끝자락이었지만 비는 여전히 거세게 땅을 적시고 있었다.

 

 

실내를 가르는 휘슬 소리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옷자락으로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코트 밖으로 나가 수분을 보충하자 시원한 물에 머리의 열이 좀 식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또렷해진 시야로 체육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벌써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시합을 앞두고 있어 이 체육관도 곧 안녕이었다. 체육관 한편에서 집합이라 외치는 목소리에 빈 물통을 내려놓곤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걸쳐진 타월을 들고 무리로 걸어갔다.

 

 

 

요즘 부쩍 답지 않게 심경이 복잡했다. 알 수 없는 울렁임에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 싶어 재빨리 인사를 한 뒤 체육관을 나섰다. 뒤에서 야마구치와 히나타가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딱히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 팀에 있으며 소통하는 법을 배웠지만 지금 느끼는 이 술렁임의 원인은 나조차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리를 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산했다. 투둑, 투둑. 빗물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 골목을 채웠다. 그다지 집에 빨리 가고 싶진 않았기에 고개를 숙이고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 시선 끝에 서점이 눈에 걸렸다.

 

 

우산을 입구에 두고 서점에 들어서자 서늘한 냉방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두리번거리다 잡지코너에서 배구 잡지를 찾았다. 최신호인 게 서너 개쯤 보였다. 일단 제일 유명한 잡지부터 펼쳐보았다. 마음 같아선 꺼낸 잡지를 전부 다 사고 싶지만 남은 용돈을 떠올리자 살 수 있는 건 한 권뿐이었다. 전체적으로 훑으며 필요한 내용이 많은 걸 사기로 마음먹었다.

 

 

세 번째 권까지 보았을 때, 첫 번째 잡지가 가장 좋아보였다. 그래서 보던 것들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은 별 다른 기대 없이 펼쳤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눈으로 몇 초 만에 읽을 수 있는 짧은 인터뷰였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그가 맞는지 확인했다. 숨이 막혔다. 귓가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거의 2년만이었다. 그동안 그의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알려고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 이상한 고집이 들어 찾지 않았다. 사진 속 얼굴을 쳐다보다 그대로 네 번째 잡지를 계산해 나왔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그치지 않는 비처럼 정처 없이 계속 걸었다. 그러다 예전에 우연히 그를 마주친 공터가 나왔다. 우산을 접고 걸터앉을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까 산 잡지를 꺼냈다.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의 뒷부분부터 훑어보았다. 내용은 원래 사려던 게 훨씬 더 좋아 살짝 돈이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쉬다 다시 그 페이지를 펼쳤다. 잘 지내는지 얼굴이 좋아 보였다. 올해부터 레귤러가 돼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터뷰에는 앞으로의 목표나 팀원들끼리 사이가 좋은지 등등 뻔하디뻔한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겨우 그런 질문에도 그의 소식이 담겨 있어서 인지 자꾸 눈이 갔다. 눈을 감자 대학교 유니폼을 입은 그가 익히 아는 그 깔끔한 폼으로 뛰어올라 서브를 넣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졌다. 바깥의 빗소리를 일정하게 쿵쿵 거리는 소리가 장악했다.

 

 

 

먼 길로 돌고 돈 끝에 어두워지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캄캄한 거실이 반겨주었다. 뜬금없이 오늘 오전에 담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역시 도쿄로 갈 거지? 가고 싶은 대학은 좀 찾아 봤니? 넌 성적은 좀 부족해도 교외활동 기록이 좋으니까 면접이나 논술 준비만 잘 하면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잘 생각해 보고 이번 주 내로 가고 싶은 학교 리스트를 적어 오렴. 알겠지?’

 

 

도쿄. 대학. 새로운 팀. 어느새 현관의 센서등이 꺼졌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바깥의 불빛만이 내부를 은은하게 비춰주었다. 귓가에서 마찰하는 배구화 소리와 코트에서 공이 튕겨 오르는 소리가 윙윙 울렸다. 갑자기 서브를 넣기 전에 늘 습관처럼 공을 쓰다듬는 그 손이 보였다. 그리고 코트 너머를 매섭게 바라보던 그 눈동자. 호흡을 멈추며 눈을 떴다. 언제 눈을 감았던 걸까. 흠칫거린 탓인지 다시 센서등이 켜졌다. 젖은 우산을 내려놓은 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을 켰다.

 

 

 

저녁을 먹은 뒤 씻고 방에 들어왔다. 선풍기를 켠 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형광펜과 잡지를 챙겨 침대에 앉았다. 첫 번째 장부터 찬찬히 읽으며 필요한 부분엔 밑줄을 그었다. 간신히 비운 머리를 다시 복잡하게 만들기 싫어 일부러 그 페이지는 넘겼다. 얇은 잡지였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읽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숙이고 있는 목이 뻐근해졌다. 잠시 잡지를 내려놓자 선풍기 바람에 페이지가 마음대로 넘어갔다. 다급하게 잡지를 잡았다. 배구 용품 광고와 시답잖은 고민 해결 코너가 보였다. 예전엔 배구 관련 고민이 올라왔을 줄 알고 그 페이지까지도 꼼꼼히 읽었지만 몇 권 읽다 보니 전부 연애나 우정 관련 고민들이라서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는 페이지였다. 이번에도 그랬을 것이다. 유독 한 줄이 눈에 안 들어 왔다면.

 

 

-유독 한 사람이 자꾸 떠오르고 신경 쓰여요.

 

 

그 밑으로는 자잘한 사연과 함께 편집자의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사랑이 아닐까요. 라니. 다시 한 번 위의 사연을 읽어보아도 도대체 어디서 질문자가 그 상대를 좋아한단 말이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굴려 다른 사연을 읽어 보았다.

 

 

-정말 좋아하는 사인데 서로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요. 운명이 아닌 걸까요.

 

 

이름.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눈동자에 서로의 이름이 새겨진단 거였나. 목이 다시 뻐근해져서 아예 침대에 누운 뒤 잡지를 든 채로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눈동자에 새겨지는 상대의 이름. 그러나 이름이 새겨지는 때는 제각각이었기에 만난 지 10년 만에 새겨지는 경우나 평생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 새겨지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진 않았다. 이름이 나타나면 좋은 것이고 안 나타나도 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답변에선 인연의 끈이 어떻게 묶일지는 아무도 알 수도 없으며 상대의 이름이 언제 새겨질지 조차도 예측할 수 없으니 그저 지금의 인연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란 말이 적혀 있었다. 잡지를 가슴께에 얹어 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이 눈동자에 새겨진 상대라. 문득 익숙한 눈동자 속에 새겨진 내 이름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가. 뜨끈해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침대 밑 선풍기 바로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열기는 금세 가라앉았지만 놀란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굴려 옆에 떨어져 있는 잡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덜 본 잡지를 가방에 다시 넣고 오늘은 좀 일찍 잠들기 위해 불을 껐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오진 않았다. 날이 좀 흐리긴 했지만 간만에 우산을 안 써도 돼 좋았다. 한가한 생각도 잠시. 다시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어제 읽은 잡지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지끈 거려 이마를 짚다가 뒤에서 자전거벨 소리와 함께 이상한 기합을 넣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주황색 머리.

 

 

카게야마---!! 먼저 간다-!!!”

 

 

그 소리를 신호로 정신없이 달려 체육관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대충 손으로 훔쳤다. 자신이 이겼다고 눈앞에서 펄쩍펄쩍 뛰는 히나타의 얼굴을 잡으려 했으나 요리조리 피하는 탓에 계속 실패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이 짜증났으나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으니까 이쯤하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방학을 해서 그런지 학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히나타 보게랑 오늘 연습 스케줄을 이야기 하다 보니 부원들이 하나둘 체육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부 집합하였을 때, 간단하게 며칠 뒤부터 있을 합숙에 대한 공지를 들은 뒤 팀을 나눠 연습 경기를 하기로 했다. 공을 건네받은 뒤 라인 뒤에 섰다.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진정시킨 뒤 습관처럼 공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떠오른 새하얀 손. 흠칫 거리다 서브 자세가 흐트러졌다. 다행히 공은 상대의 손을 맞고 튕겨나갔지만 제대로 넣은 서브가 아니라 분했다. 휘슬 소리와 함께 다시 공이 건네졌다. 이번엔 떠올리지 말자. 라고 생각하며 공을 올렸다.

 

 

봇물이 터진 것처럼 그동안 의식적으로 막아왔던 생각은 쉴 새 없이 밀려왔다. 연습에 집중이 안 되었다. 도대체 뭐가 원인인 걸까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딱히 이렇다 할 건 없었다. 얼마 전부터 생긴 알 수 없는 울렁임과 물 밀 듯 쏟아지는 그에 대한 기억은 머리를 다 헤집어 놓았다. 컨트롤이 안 되는 자신이 짜증났다. 신경질 적으로 땀을 닦는데 문득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마! 카게야마-!! 더위 먹었냐!”

 

 

?”

 

 

더위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인상을 구기자 히나타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리곤 다시 붕붕 뛰어오르며 말했다.

 

 

또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만 생각하고 있지 말라고!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말하란 말야! 또 까먹은 거야?!”

 

 

이목이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다들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최근 말을 거의 안 했던 것이 떠올랐다. 뭐라도 말은 해야겠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원인을 모르니 그냥 간단하게 증상만 말하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요즘 좀 뒤숭숭해서. 걱정시켜서 그-, 미안.”

 

 

뭐야, 왕님도 기분이 뒤숭숭할 때가 있어? , 혹시 졸업이다, 고교 마지막 시합이다 이런 감상에 젖은 거야? 그 왕님이? 설마-. 거짓말이지?”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츠키시마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뒤로 돌아 냉수만 들이켰다. 의외의 곳에서 원인을 하나 찾았다. 그렇다면 다른 한 증상의 원인은 뭘까.

 

 

 

연습이 끝나고 체육관을 나서려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누군가의 생일을 알리는 알림창이 떠 있었다. 도대체 이건 언제 저장해 둔 걸까. 점점 울렁임이 심해져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까지 달릴까 고민하던 중 문득 가방 속의 잡지가 생각나 져지를 벗어 가방 위를 덮곤 근처에 있던 나무 밑으로 달렸다.

 

 

비에 젖은 져지를 대충 팔에 걸치고 가방 안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내용물은 젖지 않은 것 같아 안심하는데 누군가가 옆에 뛰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

 

 

“-토비오 쨩?”

 

 

의외의 장소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놀란 얼굴을 한 그를 마주하자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스쳐지나가며 헝클어졌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던 찰나 입이 먼저 움직였다.

 

 

보고 싶었어요.”

 

 

스스로의 말에 놀란 사이 그의 눈동자는 점차 당혹으로 물들어 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동 소리는 점차 빗소리보다도 커졌다. 그리고 나는 마주한 차색 눈동자에 익숙한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오이카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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