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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오이] 선물 中

 퀭한 얼굴을 한 이와이즈미와 마츠카와, 하나마키를 배웅한 오이카와는 하품을 하다가 소파에 앉아 밤새 던져 놓았던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어젯밤에 진동이 몇 번 울리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에 푸른 불빛이 깜빡였다. 부재중 전화 3. 메시지 9. 모두 카게야마로부터 온 것이었다. 잘 도착했어요. 뭐해요? 저녁은 먹었어요? 오이카와 씨. 여기 해지는 거 예뻐요. 나중에 같이 오면 좋겠어요. 오이카와 씨? 자요? 잘 자요... 오이카와는 메시지를 보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져 그대로 휴대폰 화면을 껐다. 얼마 전에 부모님을 찾아 뵀을 때, 슬슬 눈동자에 있는 이름의 주인을 데리고 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신 것 때문일까.

 

 그때, 몇 달 만에 집에 온 오이카와의 눈에 누군가의 이름이 떴다는 것을 안 그의 부모님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상대방을 집에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며 아직 그럴 마음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빨리 그 이름의 주인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단 걸 알았기에 그들은 오이카와의 뜻을 존중해 주며 그저 가끔 상대의 안부만 물어보았다. 그렇게 몇 년. 오이카와의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졌고, 상대방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보였기에 그들은 간만에 집에 들린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했다. 카게야마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몇 년을 같이 지내며 내린 결론은 나쁘진 않다.”였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두통이 일자 오이카와는 머리를 헝클이곤 화장실로 향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땐 뛰는 게 최고였다.

 

 늘 다니던 길로 로드워크를 하던 오이카와는 이렇게 혼자 뛰는 게 얼마만인가 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독립했던 오이카와를 따라 카게야마도 얼마 안 있어 오이카와의 집 근처로 거처를 잡았다. 아직도 로드워크를 하겠다고 내려왔다가 현관 앞에 서 있는 카게야마를 보고 놀랐던 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하철을 타면 역 하나 정도, 걸어선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카게야마의 집을 떠올리던 오이카와는 경로를 바꿨다.

 

 번화가에 위치한 카게야마의 집이 보이자 주변 풍경도 조금씩 조용한 주택가에서 복잡한 상가로 바뀌었다. 오이카와는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는 대로를 건너 카게야마가 살고 있는 맨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손에 익지 않은 층 버튼을 눌렀다. 카게야마가 없을 때 이 집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이 근처로 이사했다며 자신의 집에 찾아왔던 그 날 카게야마가 건넸던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여기서 살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손자취가 느껴지는 물건이 별로 없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불을 켜고 가만히 거실 소파에 앉아서 두리번거렸다. 손에 잡히는 거라곤 TV 리모컨과 배구 잡지 하나뿐이었다. 잡지를 들어 대충 훑어보던 오이카와는 뛰어 와서 그런지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침실로 보이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실도 비슷했다. 눈에 띄는 거라곤 배구공, 벽에 붙은 연습 스케줄과 달력, 붙박이장, 그리고 액자. 오이카와는 침대 옆에 놓인 액자를 들어올렸다. , 이거 언제였더라. 예전에 같이 데이트랍시고 놀이공원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이 날 이렇게 웃었던가.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그 옆에서 카메라는 안 보고 오이카와를 힐끔거리던 채로 찍힌 카게야마를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 동안 사진을 쳐다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곧 액자를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그는 재미없다고 생각하다가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하나 있는 걸 발견했다. 다른 곳과 별 다를 게 없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심 기대하며 오이카와는 방문을 열었다. 방은 서재에 가까워 보였다. 구색 갖추기 용으로 보였지만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한 쪽에는 운동기구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오이카와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책장을 살펴보았다. 배구 관련 교재나 잡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제일 밑 칸에서 앨범으로 보이는 걸 발견했다. 앨범을 펼치자 사진과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날짜와 장소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정리한 앨범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런 건 또 언제 만들었다니. 몇 년을 만났더니 그새 쌓인 추억이 꽤 많았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서 한 장 한 장 살펴보다 보니 카게야마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흔적들이 느껴졌다. 앨범의 마지막 장에 있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손끝으로 살짝 사진을 쓸어보다 앨범을 다시 책장에 넣었다.

 

 카게야마의 집에 들렸다오는 바람에 길어진 로드워크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은 참 빨리 흐르는데 막상 생각해 보면 카게야마가 돌아올 날은 나흘이나 남아 있어 느리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방금 감아 축축한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냉장고를 열었다. 영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잠시 냉장고 앞에서 고민을 한 그는 달걀 두 개와 얼려둔 식빵 봉지를 꺼냈다. 식빵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해동시키면서 오이카와는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었다. 우유도 넣어서 만들면 더 맛있겠지만 혼자서 해먹는데 그 만큼의 수고를 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대충 계란을 주걱으로 휘휘 젓고는 적당히 익었을 때 접시에 덜어내었다. 적당히 따뜻해진 식빵과 스크램블을 테이블에 두고 마지막으로 냉장고에서 케첩과 잼을 꺼냈다. 그는 식탁에 앉아서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 시간 정말 안 간다.”

 

 

 “그래서, 뭐가 고민인데?”

 

 오이카와는 결국 삼일 째 아침에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하나마키에게 연락했다. 하나마키의 회사와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오이카와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고 보다 못한 하나마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 맛키.”

 

 “그러니까 뭘.”

 

 “엄마가 토비오 쨩 집에 데리고 오래.”

 

 “데리고 가면 되잖아.”

 

 “아니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구. 대뜸 엄마가 데리고 오랬다고 말하면 오해하지 않을까?”

 

 “뭘 오해하는데. 솔직히 너네 사귄 지도 좀 됐고 슬슬 서로 부모님께 인사정도는 드려도 되지 않나? 심지어 그, 뭐냐, 운명의... 그런 관계잖아.”

 

 “하지만 아직 결혼은 좀.”

 

 “부모님께 인사드린다고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어머니가 저녁 한 번 먹자고 하셨다고 하고 데리고 가.”

 

 “싫어. 토비오라면 분명히 그 말 듣고 오해할 거라고.”

 

 머리를 싸매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하나마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꽤나 오랜 시간 오이카와를 봐 온 하나마키는 지금 말해봤자 귓등으로 들을 거란 걸 알았기에 그냥 태평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고 보니 카게야마랑 처음 다퉜을 때도 이렇게 와서 한탄했지 않았나. 그 때도 저렇게 머리를 쥐어뜯더니 정말 한결 같네. , 나중에 결혼하고 부부싸움하면 짐 싸서 우리 집 오는 거 아니야? 잠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한 하나마키는 절대 집 주소는 안 알려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뭐라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오이카와의 폰이 진동했다. 카게야마였다. 오이카와는 발신인을 보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통화 거부 버튼을 눌렀다.

 

 “왜 안 받아?”

 

 “뭐라고 할지 모르겠어서.”

 

 “최악이네.”

 

 “-그렇게 말하지 마. 안 그래도 지금 괴롭다고. 몇 번 무시하다 보니 이젠 받고 싶어도 어색해서 아무 말도 못 하겠단 말이야.”

 

 “설마 걔 훈련 간 뒤로 계속 연락 무시하고 있냐?”

 

 “진짜 나도 날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싫은 건 아닌데.”

 

 “난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

 

 하나마키는 귀찮다는 듯이 말하며 오이카와의 접시에서 튀김을 하나 가져와 입에 넣었다.

 

 “맛키! 뺏어 먹을 거면 적어도 제대로 듣기라도 하고 먹어!”

 

 “그래서 잘 들어주고 있잖아. 나니까 이만큼이라도 들어주지. 이와이즈미였어 봐, 이미 한 대 맞았을 걸?”

 

 딱히 반박할 말을 못 찾은 오이카와는 웅얼거리듯이 불평하면서 턱을 괴곤 창밖을 바라보다 잠잠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서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어 치우는 데에 집중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디저트까지 먹으려면 서둘러야했다.

 

 

 하나마키와 헤어진 오이카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더 시간이 안 갈 것 같아서 적당히 좀 돌아다니기로 결심했다. 간만에 나온 시내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못 보던 가게들이 많이 생겼기에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문득 새 배구화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 자주 갔던 스포츠 용품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경쾌한 인사소리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곤 오이카와는 자연스럽게 신발 코너로 향했다. 그는 눈에 드는 디자인 몇 개를 살펴보다가 직원을 불러 신어 보았다. 그리곤 결정한 상품을 직원에게 건네며 포장해달라고 말한 뒤, 자신의 신발로 다시 갈아 신었다. 그러다 얼핏 시야에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깔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잠시 그 운동화를 바라보다 직원을 다시 불렀다.

 

 “저기, 이것도 280으로 같이 포장해 주세요.”

 

 

 오이카와는 쇼핑백 두 개를 든 채로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옷 구경도 하고 버스킹도 좀 보다가 카페에 들어갔다. 딱히 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디에 좀 앉아서 쉬고 싶어 들어간 것이었기에 그는 그냥 커피를 한 잔 시키곤 창가에 앉았다.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오이카와는 건너편 건물 옥상에 있는 전광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계속 여러 광고를 돌려가며 틀어주는 것 같더니 이번엔 여행 상품 광고였다. 발리. 그러고 보니 인도네시아 쪽은 한 번도 못 가본 것 같네. 다음 휴가 땐 토비오랑 여행이나 한 번 갈까. 오이카와는 광고를 보며 여름에 해변에서 여유롭게 쉬며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토비오라면 수영복 입은 모습도 꽤 볼만 하겠지. 그러고 보니 수영은 할 줄 아나? 물에서 같이 놀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 보고 싶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놀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한 번 자각하고 나자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금은 뭐하고 있을까. 돌아가며 경기 중이려나. 아니면 개별 트레이닝? 밥은 잘 먹고 있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카게야마와 같은 훈련을 간 동료 선수의 SNS 계정에 도달했다. 오이카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SNS 계정을 타고 익숙한 이름의 계정을 찾았다. 역시나 그는 합숙 시작일부터 이런저런 사진들을 올려놨었다. 단체사진부터 몇몇이 함께 찍은 사진, 셀카, 다른 사람을 찍은 사진 등. 오이카와는 스크롤을 내려 카게야마가 나온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 여기 있다. 버스 안에서 찍은 것 같은 사진에서 카게야마는 한 귀퉁이에 앉아 오이카와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볼이 터질 것 같은 모습으로 찍힌 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집중해서 카게야마가 나온 사진들을 보며 저장 버튼을 누르던 오이카와는 갑자기 진동과 함께 미리보기로 뜬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카게야마였다. 오이카와 씨, 제가 잘못했어요. 얘는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오이카와는 액정을 쓰다듬다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미안해, 토비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엎드린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민할 날은 하루나 더 남아있었지만 오이카와의 마음은 이미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