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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오이] 비와 당신, 그리고 기다림

 

for 세이님

 

 

 

 

 

 비가 옵니다.

딱 그 한 문장을 쓰고 나서 아침부터 자리 잡은 카페에 앉아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각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멍하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종이에 갖다 대고 있던 펜이 문득 떠올랐다. , 역시. 너무 오래 종이를 누르고 있는 바람에 잉크가 번져 있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적힌 몇 단어와 커다란 점. 잠시 종이를 찢고 다시 쓸까 싶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창밖의 비에 발이 묶여

 저는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오지 않을 당신을 기다립니다.

한 문장을 더 적었다. 이번엔 펜을 내려놓고 커피 잔을 들었다.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여전히 향은 좋았다. 가만히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키자 커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이 떠올랐다. 그 날,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는지 흥얼거리며 커피를 내렸다. 아침을 알리는 그 향에 눈을 뜨자 불쑥 뜨거운 커피를 내민 그가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새카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지독히도 쓴맛이 혀에 와 닿았다.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내일도 하염없이

 제 생각도 안 할 당신만을 떠올리며

 비를 기다립니다.

좀 크게 싸웠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달라서 우리는 소리를 지르고 이내 멱살까지 잡으며 싸웠다. 집안의 액자와 컵 몇 개가 깨졌었고, 화를 식히려고 잠시 나갔다 온 사이 그는 사라져 있었다. 그의 물건이 전부 사라진 집에서 나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깨진 액자를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액자 속의 그와 나는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좋게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몇 년이나 지속된 관계에 나름 영원을 꿈꿨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언제든지 깨질 수도 있단 듯이 말하는 그에게 당시의 나는 조금 질려버렸다. 언행이 가벼울 때가 많단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우리 관계까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 몰랐기에 좀 충격이었다. 액자를 다시 원래 자리에 두고 청소기를 들고 와 깨진 조각들을 치웠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시계를 바라보며 그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이틀, 사흘. 그리고 몇 개월. 그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래야 비 때문에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집에서 그를 기다리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와 내가 자주 들렸던 카페로 장소를 옮겼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장소에 그가 한 번쯤은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무 커피나 한 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피가 다 식고, 새로운 잔을 들고 와서 그 잔을 다 비우고.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 먹고. 아무 말이나 종이에 적었다가 구겨버린 게 몇 번이더라. 그 동안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다. 슬퍼졌다. 그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단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는 이 머그잔의 커피처럼 냉랭하게 식어버린 게 아닐까 무서웠다. 그래서 다른 연락 방법을 알아도 그저 카페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그래야 비 때문에

 발이 묶여 제가

 당신을 기다리는 거라

 변명할 수 있으니까요.

가만히 턱을 괴고 눈을 감자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주 만지지는 못했지만 보드랍던 그 머리칼과 한 손에 다 감싸지던 얼굴, 감정이 다 드러나던 눈동자, 고운 말보단 퉁명스러운 말이 더 많이 나오던 그 입술, 그리고 종종 마주잡아 오던 그 따뜻한 손. 불현 듯 연애 초반에 무신경했던 내가 그의 기분을 알아맞히기 위해 쩔쩔 맸던 것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그래도 눈치가 좀 생겨서 어느 정도는 그의 기분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 때는 정말 힘들었다. , 또 다시 슬퍼졌다. 그를 떠올리자 그가 내 옆에 없단 사실이 더 확연하게 다가왔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비가 옵니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적고 수첩을 덮었다. 펜을 끼운 수첩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고, 트레이를 카운터에 가져다 준 뒤, 입구의 우산을 꺼내들었다.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문을 열고 몇 발자국 나오다 시선 끝에 다른 이의 신발코가 보였다. 몸을 비켜주려다 어딘가 익숙한 신발에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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