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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츠오이] fallin' to

 동료 직원이 갓난아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에 태어난 딸이라며 입이 귀에 걸린 그 직원을 꼭 닮은 아기는 객관적으로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귀여웠다. 방긋 웃는 고 주름지고 빨간 얼굴에 눈이 자꾸 갔다. 그리고 내 상황이 떠오르자 미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예의상 귀엽다고 그쪽을 꼭 닮았다고 말하자 그는 이젠 소리 내서 웃었다.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고, 금연에다가 이젠 금주까지 생각 중이라며 행복하게 웃는 그를 보자 미묘한 패배감이 느껴졌다. 나를 꼭 닮은 아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적당히 그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주고 나자 어느새 휴식 시간은 끝나있었다. 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읽는데도 계속 딴 생각이 나서 읽던 부분을 계속 다시 읽게 되었다. 제기랄, 아까 본 사진 속 아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기와 함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그래, 남자는 임신을 할 수 없지. 누군가가 후회할거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오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집에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절대 빠지지 말라며 부장이 엄포를 놓는 바람에 회식 자리에 끌려가다시피 갔다. 연세가 지긋하신 부장님은 화통한 목소리로 오늘은 내 아들내미가 장학금을 타온 기념으로 내가 산다!’라고 외치시며 술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한 번에 잔을 비우고 나자 지독하게 쓴 맛이 입에 맴돌았다.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다. 나는 적당히 안주로 배를 채우며 언제 집에 돌아가는 게 적당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에 동료 직원이 앉았다. 나와 동갑에다 입사동기인 나오코 씨는 평소에 제법 친하게 지낸 동료 중 하나다. 그녀는 내 술잔을 채워주고는 자신의 잔을 들어 내밀었다. 그 술잔에 내 잔을 맞부딪치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다시 또 잔이 비워지고, 채워졌다. 한참을 업무나 회사의 최근 소문 같은 것들을 이야기 하다가 나오코 씨는 문득 사적인 질문을 해왔다. 잇세이 씨는 만나는 사람 없어요? 우리 벌써 28살이잖아. 나는 요즘 주변에서 빨리 결혼 안 하냐고 재촉해서 죽을 맛이에요. 울상을 지으며 술잔을 비우는 나오코 씨의 뺨은 벌써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꽤 오래 만나고 있는 애인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분명히 머리로는 그랬다. 하지만 내 입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딱히 없어요. 안 그래도 나도 주변 사람들이 계속 물어봐서 골치 아파 죽겠네요. 나는 말해 놓고도 아차 했다. 벌써 10년 째 사귀고 있는 연인이 있음에도 없다고 말하다니. 오이카와의 섭섭한 표정이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떡하겠는가. 이제 와서 아니, 사실 10년이나 만나는 사람이 있어.’ 라고 말할 순 없잖아. 어차피 오이카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적당히 자기 합리화를 하며 나오코 씨가 빨리 결혼하라며 나이가 많으면 애 가지기도 힘들다고 말한 지인을 욕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오코 씨는 이야기를 끝내곤 활짝 웃으면서 나와 눈을 마주치곤 말했다. 잇세이 씨, 우리 연애할래요? 거절해야했다. 그러나 입을 연 순간 머릿속에서 한 가지가 스쳐지나갔다. 나오코 씨는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여자란 사실이. 좋아요. 미쳤지, 내가.

 

 집에 돌아가자 나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는지 소파에서 자고 있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곤히 자고 있는 걸 깨우기가 뭣해 방으로 들어가 이불과 베개를 들고 나왔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는 오이카와를 보자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마에 입을 맞춰주려다 방금 다른 사람과, 그것도 여자와 키스를 하고 왔단 게 생각나서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미 나오코 씨와 사귀기로 한 것부터가 선을 넘은 짓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겨두고 싶었다. 술과 고기 냄새가 찌든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도대체 자식이 뭐라고 나를 이렇게 흔드는 건지. 내가 나이가 들긴 했단 생각이 들었다. 씻는 내내 아까 끌어안았던 나오코 씨의 작은 몸과 부드러운 입술이 생각났다. 머리를 흔들었다. 여긴 집이다. 오이카와와 나의 집. 그리고 오이카와는 지난 10년 동안 사귄 내 애인이고. 하지만 남자잖아. 나는 내 무의식에 깜짝 놀라 샤워기 물을 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이카와가 남자란 것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내일은 퇴근할 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것을 잔뜩 사와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압박감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바빴다. 집밖에선 나오코 씨와, 집안에선 오이카와와 관계를 지속해야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지 못하도록 신경 써야 했으며, 한 사람과 만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최대한 주변을 돌아 봐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초반의 이야기였다. 그 상황이 익숙해지자 나는 점차 대담해져서 오이카와와 밥을 먹을 때에 나오코 씨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고, 나오코 씨와 있을 땐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리고 직장동료와 밥을 먹는다며 오이카와에게 거짓말을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오코 씨와 만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나는 오이카와에게 소홀해 졌으며,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투정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는데, 이제는 조금 징그럽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이카와와 있으면 계속 여리고 상냥한 나오코 씨와 그를 비교하게 되었다. 내 머리에서 오이카와보다는 나오코 씨의 영역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실수로 함께 술을 마신 날 나오코 씨를 부축하다가 그만 셔츠에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묻어버렸다. 그리고 세탁물을 맡기려던 오이카와가 그것을 발견했다. 나는 내 셔츠를 들고 있는 오이카와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며 변명할 거리를 생각해 내는데 오이카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맛층, 어제 회식자리에서 술 취한 동료를 부축해 주었나 보네. 립스틱이 깔끔히 지워져야 할 텐데. 할 말이 없어졌다. 끊임없이 머리를 돌리며 생각해낸 변명이 소용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몇 달 만에 다시 죄책감을 느꼈다. 오이카와의 힘없는 미소는 나에게 짐작 가는 것이 있지만 말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정리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오코 씨와 만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젠 나와 나오코 씨를 닮은 아이까지 상상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녀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단 생각만 들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오이카와와의 이별까지도 고려할 정도로 나에게 나오코 씨는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 초반처럼 조심하며 나오코 씨를 만나고 있을 무렵, 오이카와가 회사에 찾아왔다. 도시락을 갖다 주러 왔다는 오이카와를 보자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들이 누구냐고 묻기 시작했고 나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룸메이트라고 대답했다. 속상해 하는 오이카와를 볼 엄두가 안 나서 나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오이카와가 이제 다시 가야겠다고 말하기에 나는 얼른 그를 배웅해 주겠다고 말하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여기서 나오코 씨와 마주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언제나 바라지 않는 일일수록 쉽게 일어나는 법.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오이카와와 나는 나오코 씨와 마주쳤다. 누군지 소개시켜 달라는 나오코 씨의 말에 동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룸메이트라고 말하자 나오코 씨는 나에게 붙어 서며 말했다. 잇세이 씨에게 몇 번 들었는데. 정말 잘생기셨어요! 저는 잇세이 씨와 교제중인 미나미 나오코예요. 앞으로도 잘 부탁 드려요!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미소 짓는 나오코 씨를 보며 당황한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오이카와의 안색을 살폈다. 오이카와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오이카와는 홀연히 회사를 떠났고, 며칠 뒤 직장에서 그가 쓰러졌단 소식을 받았다.

 

 새하얀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오이카와는 충격적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그런지 늘 건강한 모습만 봐왔었기에 처음에 그가 쓰러졌단 걸 들었을 때에는 믿지 못했다. 그리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자 나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언제 이렇게까지 마른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오이카와에게 무심했단 사실을 자책하며 그가 입원한 동안 정성을 다해서 간호했다. 이틀 만에 깨어난 오이카와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오이카와가 퇴원을 하고 기운을 차리면 관계를 정리하는 게 그를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그만 헤어지자고 해야지. 오이카와가 부디 나 말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며 나는 마지막으로 오이카와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회사에 휴가까지 내며 나는 오이카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병실의 간이침대에서 자고, 오이카와가 밥을 먹는 걸 보고난 뒤 근처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오이카와가 치료 받는 것을 보며 지낸 것이 나흘이었다. 그리고 퇴원하기 하루 전날이 되었다. 드디어 병실 생활이 끝난단 기쁨과 오이카와와 관계를 정리해야겠단 두려움, 그리고 나오코 씨를 만난단 기대감으로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다 초침소리에 잠들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나는 악몽에 잠이 깼다. 깨고 나니 무슨 꿈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불쾌감은 지속되었다. 나는 한숨을 쉬곤 땀을 닦으며 무심코 병실 침대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둠 속에서 시계를 보니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시간대인데 어딜 간 거지.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확인해 보았지만 오이카와는 없었다. 병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그가 어딜 갔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저쪽 복도 끝에서 오이카와가 나타났다. 나를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는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물을 마시러 갔다 왔다며 나를 지나쳐 들어가는 오이카와는 지쳐보였다. 나는 병실에 놓인 물병을 힐끔 바라봤다가 그냥 아무 말 없이 침대로 가서 누웠다.

 

 오이카와는 퇴원을 하고 집으로 가는 내내 조용했다. 나도 딱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입을 다물고 운전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입이 자꾸 말랐다. 집에 도착하자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겨우 며칠만 집에 안 들어 왔는데도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에 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안방으로 가서 불을 켰다. 빨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오이카와도 따라 들어오더니 갑자기 나를 벽으로 밀치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맞닿으려 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이카와는 멈칫거리더니 방을 나갔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그날은 같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따로 잔 날이었다.

 

 오이카와가 퇴원하고 몇 주가 흘렀다. 나는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오이카와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하려 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이카와도 딱히 별말 없이 나와 한 집에서 생활하고,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비슷한 시간대에 잠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오코 씨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프다던 룸메이트는 괜찮냐며 나중에 같이 밥 먹을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예상과는 달리 조용하게 시간은 흘렀다.

 

 그러다 나오코 씨와 사귀게 된지 거의 1년이 다 돼 갈 무렵, 나오코 씨는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다며 결혼하자고 말했다. 어차피 둘 다 나이가 있으니 최대한 간소하게 결혼식을 하고 빨리 살림을 꾸리자고 나오코 씨는 웨딩 잡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제 정말 오이카와와 헤어져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거의 내 인생의 반을 알던 연인과 이별한다는 것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한껏 들떠서 드레스를 고르는 나오코 씨에게 웃어주면서 속으로는 오이카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궁리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자 오이카와가 있었다. 나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로 바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며 언제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제대로 말을 안 한지 얼마나 됐더라.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인지 떠올리다 보니 이런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오이카와에게도 나에게도 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냥 지금 나가서 이야기 하자.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방을 나섰다. 오이카와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쌀을 씻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오코 씨가 결혼하자고 말했어. 미안, 오이카와. 오이카와의 손이 멈췄다.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가 들리자 오이카와는 물을 끄더니 대답했다. 집을 구할 때까지만 기다려 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천천히 구하라고 말하며 씻으러 들어갔다.

 

 씻고 나오는데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TV 소리는커녕 저녁을 차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이상하게 여기며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물이 담긴 컵 두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서로 다른 약 두 개를 꺼내 컵에 넣었다. 가루약은 순식간에 물에 녹아들어갔고, 오이카와는 티백을 꺼내 컵에 넣었다. 봐선 안 될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저 약들은 뭘까. 나는 약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오이카와가 입원했을 때 밤에 사라졌던 것이 떠올랐다.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그러나 머릿속에는 불안한 생각만 자꾸 들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오이카와는 벌써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도 의자를 빼서 그 앞에 앉았다. 저녁 시간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대화가 없으니 식사는 빨리 끝났다. 나는 아까 봤던 컵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릇을 정리하고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오이카와가 아까 봤던 컵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둘 중 하나를 나에게 내민 오이카와는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컵을 건네받았다. 여전히 오이카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그는 내가 물을 마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컵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약 때문인지 티백 때문인지 물은 썼다. 곧 정신이 희미해졌다. 눈꺼풀이 내려오고 컵을 든 손에 힘이 풀리자 오이카와가 컵을 가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대자 긴장이 풀렸다.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오이카와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보다 더 어려보이는 오이카와는 나에게 활짝 웃어주더니 뒤로 돌아서 사라졌다. 가지마. 나는 멀어지는 오이카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잡히지 않았다. 우스웠다. 후회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리. 오이카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눈앞에 암흑이 내려앉고 무언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검은 수마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