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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와오이] 이미 버스는 떠났고

미래날조

 

 

 이와이즈미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이상하게 도쿄에 이사 온 뒤로 바깥에만 나갔다 돌아오면 온몸이 찝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공기 때문인가 라고 생각하며 샤워를 마친 이와이즈미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냈다. 하루 중 그나마 긴장이 풀려 있는 시간.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소파에 앉은 그는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뉴스, 스포츠 중계, 드라마, 예능. 채널을 계속 돌리다가 이와이즈미는 낯익은 얼굴이 나오는 채널에서 손을 멈췄다. 얼마 전부터 새로 시작한 드라마로 점차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는 이와이즈미의 소꿉친구, 오이카와가 주 조연으로 나온다. 대학 때까지도 배구를 하던 오이카와는 돌연 캐스팅이 됐다며 연예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지상파 방송의 황금 시간대 드라마에서 주 조연으로 캐스팅된 오이카와의 몸값은 계속해서 치솟고 있다. 이와이즈미는 꺼내 왔던 맥주 캔을 땄다. 분명 냉장고에 넣어 놨었는데도 밍밍하게 느껴졌다.

 

 드라마는 어느새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여주인공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가 뺨을 맞았다. 맞은 곳을 감싼 오이카와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자 눈물이 맺힌 것이 보였다. 생각보다 연기에 소질이 있단 말야. 이와이즈미는 맥주를 홀짝이면서 드라마를 시청했다. , 오징어 먹고 싶다. 이와이즈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살았던 오이카와의 빈자리를 오이카와의 드라마를 보다가 돌연 느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같이 살 때 항상 장을 보러 같이 갔었다. 그때마다 맥주는 늘 자신이, 안주거리는 오이카와가 챙겼다. 그 습관이 몸에 배여서 이와이즈미는 혼자 사는 지금도 이렇게 안주를 빼먹고 사올 때가 많다. 어느새 드라마가 끝나고 맥주 캔도 비었다. 이와이즈미는 TV 밑에서 빨간 불빛을내고 있는 디지털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이와이즈미는 딱히 볼 게 없었기에 TV 전원을 껐다.

 

 조용해지자 그는 무료함을 느꼈다. 그래서 소파에 엎드려서 충전 중인 휴대폰을 잡아 당겼다. 화면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자 방금 끝난 드라마가 검색어 순위에 올라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 이와이즈미는 드라마 이름을 터치했다. 곧 화면이 바뀌고 드라마에 대한 뉴스나 블로그 글 등이 떴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이 크게 나온 뉴스 기사 몇 개를 클릭해 보다가 검색창에 오이카와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화면이 바뀌자 오이카와의 사진과 함께 간략한 프로필이 떴다. 오이카와 토오루. 1994720일 생. 가족관계 아버지, 어머니, . 그리고 출연한 작품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프로필을 쭉 훑어보다가 연결된 SNS를 터치해 보았다. 인터넷에서 SNS로 창이 바뀌고 오이카와의 계정과 함께 그 밑으로 그의 사진들이 보였다. 연극무대에 오르기 전에, 다른 지역으로 촬영을 가서, 대기실에서, 유명한 배우와 함께, 아는 사람 공연을 보러 가서, 대본을 보면서, 등등. 오이카와가 열심히 살고 있단 게 느껴질 정도로 SNS에는 오이카와의 생활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와이즈미는 없었다. 속이 쓰렸다. 이와이즈미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끄곤 테이블 위로 던지듯이 두었다. 휴대폰은 테이블 유리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이와이즈미와 멀어졌다.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와 멀어졌다. 더 이상 오이카와의 인생에 이와이즈미는 끼어들 수 없었다. 팔로 눈을 가리면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떨어져서 쓸쓸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경멸했다.

 

 사실 그 언젠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고백을 했었다. 아마 데뷔하기 몇 달 전이었지. 그날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함께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다. 짐을 나눠든 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이카와는 오늘 저녁에 뭐 먹을까하는 톤으로 고백을 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거절했다. 자신이 오이카와를 좋아한단 확신도 없었을 뿐더러 그 당시엔 남자와 남자간의 관계에 거부감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날, 이와이즈미는 유난히 붉던 노을이 드리워진 오이카와의 얼굴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오이카와는 연예계에 뛰어들겠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이와이즈미는 후회했다. 눈을 가렸던 팔을 치우자 눈이 부시도록 밝은 형광등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자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빛 때문에 눈이 따가워서 그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보아도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이와이즈미가 살짝 고개를 돌려 환한 거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가 주로 앉아있던 소파, 오이카와가 밥을 먹던 곳, 오이카와가 자신에게 기대어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던 자리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를 해 보아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늘도 때늦은 후회를 하며 이젠 TV나 인터넷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오이카와를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