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카게오이] 이 계절이 지나면, 上

*카게오이 배포전 <사랑도 토스가 되나요? 2>에서 배포되었던 글입니다.

*미래 날조, 이별 후 재회, 부상 소재
*사고로 부상을 당해 배구를 그만 둔 오이카와는 휴학을 하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소개팅을 하러 나온 전 애인인 카게야마와 마주치게 되는데...

 

 

 

 

***

 

 

 그저께까지만 해도 덥더니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높은 기온에 적응되었던 몸은 고작 이십몇 도에서도 부르르 떨렸다. 일기예보를 보고 나왔어야 했는데. 겉옷을 안 챙겨 나온 자신을 탓하며 오이카와는 버스가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신호를 받아 멈춰 있는 차선 끝에 버스가 한 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버스 번호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전 LED 전광판으로 번호판을 바꾼 바람에 숫자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시력이 작년에 더 나빠진 바람에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꿋꿋하게, 다른 사람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안경이든 렌즈든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았다. 카페에서 메뉴판이 안 보여 늘 시키던 음료만 시키거나 휴대폰 카메라로 메뉴판을 찍어서 보는 그를 보며 그의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찼지만 그의 고집을 알기에 딱히 무슨 말을 꺼내진 않았다.

 

 오이카와는 버스가 가까이 오자 지갑에서 버스 카드를 꺼내곤 번호를 확인했다. 다행히 자신이 기다리던 버스였다. 그러나 버스는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다음 버스를 타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차라리 전철을 탈 걸 그랬나. 오이카와는 잠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뒷문과 가까운 자리에 섰다. 기온이 떨어져서 그런지 지난 두 달 동안 틀어져 있던 에어컨이 꺼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 틈으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오이카와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여기에 산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나 거리 곳곳에 기억이 배어 있었다. 그는 문득 작년 초까지 자주 갔던 라멘집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새카만 머리통 하나. 오이카와는 입술을 꾹 깨물어 주의를 환기하고는 창밖 풍경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유리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서둘러 온다고 했는데도 카페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자 출근 시간에서 이미 20분이 지나 있었다.

 

 “좋은 아침. 오늘은 좀 늦었네, 오이카와 군. 차가 막혔나 봐?”

 

 “, 공사 때문에 도로 하나가 막혔다고 그러더라구요. 죄송해요. 얼른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오이카와는 매니저에게 미안하단 듯이 웃어 보이곤 빠르게 스태프 룸으로 들어갔다. 그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익숙하게 가게 한쪽에 놓여 있는 상자들을 안쪽 창고로 옮겼다. 그리고 매니저의 지시에 따라 상자들을 선반에 정리했다. 오늘따라 유독 물품이 많다고 생각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엔 벌써 땀이 흐르고 있었다.

 

 “짐이 좀 많지? 이번에 나오는 새 메뉴에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뭐가 좀 많이 왔더라. 힘들 건데 그거까지만 옮기고 잠깐 쉬어.”

 

 “메뉴 개발할 때 만드는 사람 생각도 좀 해주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이야.”

 

 오이카와가 불만스럽게 말하며 턱에 흐른 땀을 손으로 훔치자 매니저가 앞치마에 넣어놨던 손수건을 건네주며 웃었다. 오이카와는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으며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매니저는 오이카와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로, 그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을 그저 친한 남동생 정도로 생각해주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 군, 복학 언제 한댔지?”

 

 “내년이요. 이제 몇 개월 안 남았네요.”

 

 “어디 여행 계획은 없고? 복학하면 여유 없을 거 아냐. 졸업반이라 바로 취업 준비 들어가야 할 거고. 취직하면 회사에 눈치 보여서 휴가 내기도 어렵고. 생각 없었으면 한 번 고민해 봐. 알바야 대타 구하면 되는 거니까.”

 

 여행. 오이카와는 잠시 눈을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달력에는 계절에 어울리는 관광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는 몇 달 전에 계획에 결제까지 다 해둔 여행을 환불 시기도 놓쳐 그대로 날려버렸던 것을 떠올렸다.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오이카와가 말이 없자 매니저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오이카와는 곧 그 시선을 느끼고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여행은 생각도 못 해 봐서 잠깐 고민했어요. 그렇네요. 바빠지면 꿈도 못 꿀 테니 여행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지? 내가 제일 후회하는 게 대학생 때 여행 안 다니고 알바만 한 거거든. 계획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

 

 “,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카운터 보러 갈게요.”

 

 오이카와는 문을 닫고 잠시 거기에 기대었다. 오늘 아침에 버스에서부터 무리를 해서 그런지 무릎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재활치료를 꾸준히 다니고 있어서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오늘처럼 오래 서 있거나 무리를 하면 불편한 둔통이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카운터로 향했다.

 

 정신없이 주문을 받고 메뉴를 만들다 보니 어느새 교대시간이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다른 알바생에게 계산대를 넘기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는 굳은 무릎을 주무르다 혹시 몰라 캐비닛에 넣어뒀던 카디건을 입고 나와 바빠 보이는 매니저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그녀는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곤 고개를 돌려 손님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며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오이카와 씨.”

 

 

 

 

***

 

 

 일어나기 싫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카게야마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어렸을 때부터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지만 가끔 이렇게 일어나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려 했으나 휴대폰 진동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조금만 더 자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20분이 지나 있었다. 카게야마는 까치집이 진 머리를 헝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은 공강인 데다 훈련도 쉬는 몇 안 되는 휴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평소처럼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로드워크를 나섰다. 일기예보에서 오늘을 기점으로 점점 기온이 낮아질 거라더니 확실히 여름용 트레이닝복이 살짝 춥게 느껴졌다. 그는 이제 좀 더 따뜻한 옷들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익숙한 동네를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왠지 오늘따라 허전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카게야마의 왼쪽 손에 반지가 사라진 뒤, 그의 선배 하나가 소개팅에 좀 나가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먹혔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이젠 괜찮지 않냐며 다시 강요를 해오기 시작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지쳐 카게야마는 그냥 한 번 만나고 치우잔 생각에 결국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괜히 나간다고 했나. 그는 옷장을 열어둔 채로 입고 나갈 옷을 고르면서 후회를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못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카게야마는 쌀쌀했던 날씨를 떠올리곤 검은 코트를 꺼내 입었다. 대학교에 들어올 때 샀던 코트인데 꽤나 마음에 들어 아직까지도 입는 것이었다.

 

 같이 밥까지 먹긴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애매한 시간대로 약속을 잡았다. 적당히 시간을 맞춰 들어가자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상대가 인사를 해왔다. 카페에서 뭘 마시는 게 친숙하지 않은 탓에 상대방에게 카드를 준 뒤에 적당히 주문을 맡기고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두 시간 정도만 앉아 있다가 집에 가는 길에 장을 봐야겠다. 카게야마는 폰에다 뭘 사서 갈지 리스트를 작성했다. 리스트가 거의 다 찼을 때쯤, 상대가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제 입맛에 맞춰서 단 거로 주문했는데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카게야마 씨는-”

 

 상대방은 취향이나 취미 같은 걸 물으며 자신은 뭘 좋아하는지, 쉴 때는 주로 뭘 하는지 등을 말해왔다. 카게야마는 이런 대화가 뭐가 즐거운지 잘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선배가 아끼는 후배라는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다 상대의 뒤쪽에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에 무심코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착각이 아닐까. 환상이 아닐까. 우연일까, 찬스일까. 카게야마는 잠시 숨을 멈춘 채로 많은 생각을 했다. 시합에서도 이만큼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수많은 고민을 했고, 상념은 곧 출입구로 향하는 오이카와로 인해 끊겼다.

 

 “죄송합니다.”

 

 카게야마는 짧은 사과를 남기곤 다급하게 다가가 오이카와의 손을 붙잡았다. 놓칠 수 없다. 그 짧은 순간 떠올랐던 생각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오이카와 씨.”

 

 카게야마가 살짝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오이카와가 돌아보길 기다렸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그를 돌아보더니 손을 뿌리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페 안의 시선이 모두 카게야마에게로 몰렸지만 그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오이카와가 사라진 문밖만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손을 멍하게 바라보다 자리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기곤 상대방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카게야마는 방금 봤던 오이카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더 좋아 보이는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사라진 모습이 떠올라 쓰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곤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밖에 나온 지 고작 두어 시간 밖에 안 됐는데도 피곤했다. 작년에 느꼈던 무력감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눈을 감자 그때의 어둡고 어지러운 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이 방송으로 나오자 카게야마는 감았던 눈을 뜨곤 몇 번 깜빡거리다 벨을 눌렀다. 버스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어온 차갑고 건조한 바람에 그는 잠시 멈췄다가 몸을 웅크리곤 자취방을 향해 걸었다. 나갈 때도 무거웠던 발걸음은 돌아가는 길엔 더 무거워져 있었다. 하아-. 깊은 한숨 대신에 카게야마는 괜히 입김을 불어봤다. 아직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진 않아서인지 희미하게 입김이 어리다 사라졌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든 잡아야겠단 결심은 오이카와가 손을 뿌리쳤을 때 흔들렸다. 혹시 정말로 자신이 싫어진 거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났다. 잡아도 되는 걸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던 카게야마의 시야에 문득 코트 자락이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기억에서 흐릿해진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토비오 쨩, 여기서 더 크면 이 코트도 짧아지겠네. 너무 크진 말아야 할 텐데. 건방진 토비오 쨩이 나보다도 커지면 더 짜증 날 것 같아.’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집 안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오이카와의 흔적들을 좇았다.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게오이] 이 계절이 지나면, 下  (0) 2018.09.02
[카게오이] 이 계절이 지나면, 中  (0) 2018.09.02
[카게오이] 선물 中  (0) 2018.03.05
[카게오이] 선물 上  (0) 2017.12.26
[카게오이] 눈동자 속의 그리움 下  (0) 2017.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