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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초상(肖像)

[이와오이] 초상(肖像)_Extra; 꿈을 꿨던 소년

 이와이즈미는 뒤에서 칭얼거리는 오이카와의 손목을 잡고 길을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수풀로 이루어진 미로는 복잡했지만 오른팔을 뻗어서 벽을 따라 걷자 어느새 그들은 미로의 중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시렁거리던 오이카와는 이젠 이와이즈미의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 이와쨩!”

 

 “조용히 해.”

 

 “뭐가 그리 급한데? 이대로 나가면 헤어져야 하잖아. 좀만 더 있다 가자니까? ?”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성가신지 인상을 쓰고는 그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자 오이카와는 재빨리 이와이즈미에게 매달려 입술을 들이밀었다. 고개를 돌린 이와이즈미 때문에 길 잃은 입술은 이와이즈미의 볼과 목덜미 그 사이쯤에 안착했다.

 

 “너 정말.”

 

 “그럼 여태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 줘.”

 

 “그건 또 왜 궁금한데.”

 

 “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으니까?”

 

 “재미없는 얘기일 텐데.”

 

 “재밌을 것 같으니까 얼른 해 봐.”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다가 오이카와의 기대에 찬 눈빛에 항복했다. 그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할지 생각하며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뗐다.

 

 “……내가 살았던 마을은 굉장히 평화로운 곳이었어.”

 

 

 

 바다 옆에 위치한 이와이즈미의 마을에서 사람들은 어업으로 먹고 살았다. 남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생선을 잡아 오면 그걸 생으로 혹은 손질해서 이웃 마을에 팔고 채소나 곡식을 얻어 오는 식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와이즈미의 가족도 같았다. 아들만 셋인 이와이즈미의 집안은 이웃집 보다 조금 더 나은 사정이었기에 그들은 남는 생선은 주위에 조금씩 나눠주기도 해 마을에서 평판도 좋았다.

 

 그의 집에서 둘째 아들이었던 이와이즈미는 원래 그림의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이 배운 일이라곤 그물을 치고, 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건져 올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이와이즈미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갑작스럽게 그의 마을에 눌러 앉은 늙은 화가 때문이었다.

 

 노인은 어느 날 낡은 물감과 붓을 들고 마을에 나타났다. 허름한 차림새의 이방인에 마을 사람들은 잔뜩 경계했으나 며칠 뒤,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된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그에게 그림을 받은 대가로 먹을 걸 나눠주며 그를 받아들였다. 화가는 마을의 빈집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가 그와 가까워진 건 우연이었다. 어쩌다 그에게 그림을 받은 어머니가 이와이즈미에게 그의 집에 음식을 가져다주란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면 아마 이와이즈미가 평생 붓이란 걸 잡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김이 나는 음식을 들고 그 노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노인은 그를 보며 반가워했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그는 마치 제 손주를 대하듯이 살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친절이 부담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 곳곳에는 종이뭉치가 떨어져 있었다. 바다나 거리 같은 풍경화나 마을 사람들의 인물화 등등이 그려진 종이들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림 속의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집 근처에 사는 아저씨로, 호탕하며 쾌활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의 익숙한 웃음이 잘 드러난 그림에 이와이즈미는 속으로 감탄했다. 고작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 한 장에서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 뒤로 이와이즈미는 노인의 집에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어떨 땐 그저 그가 캔버스를 채워가는 모습을 보며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고, 어떨 땐 그의 권유에 따라 종이에 낙서를 하듯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와이즈미는 점차 제가 본 것들을 종이에 표현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종이는 귀한 것이었기에 이와이즈미는 주로 모래 위에 그렸다. 세밀한 표현은 불가능했지만 잠깐이라도 그렇게 스케치를 하고 있으면 즐거웠다. 자신이 보는 세상을 작은 프레임 속에 가두고 간직할 수 있단 점이 좋았다. 노인은 그런 이와이즈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날이 늘어나는 그의 묘사에 그는 종이뭉치와 연필을 이와이즈미에게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이걸 받아도 되나 고민하며 사양하려는데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에 종이와 연필을 쥐어주며 손을 몇 번 토닥였다. 이와이즈미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2년이 지났다. 그사이 노인은 많이 쇠약해 졌다. 그는 이제 손을 너무 떨어서 연필이나 붓도 쥐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흐트러진 선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그림은 이와이즈미를 감동시켰다. 노인은 눈을 빛내며 제 그림을 보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방으로 가서 붓과 반쯤 남은 물감을 들고 나왔다. 노인은 테이블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이와이즈미 쪽으로 밀었다. 그림을 보던 이와이즈미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받을 수 없어요. 하지만 화가는 그에게 기어코 물감과 붓을 넘겨주었고, 이와이즈미는 어쩔 수 없이 물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늙은 노인은 침대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이와이즈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그가 살았던 집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그는 빈 방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캔버스 몇 개를 발견하였다. 모두 그의 자화상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시간 순서대로 캔버스를 나열해 보았다. 처음에는 어두운 표정의 노인이었으나 점차 그의 표정은 강인해 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린 듯한 자화상에는 며칠 전의 날짜가 적혀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노인의 마지막 자화상을 보고는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가족도 친구도 모두 등지고 평생 살던 마을을 떠나왔다. 오로지 노인으로부터 받은 물감과 붓, 그리고 종이 몇 장만 들고.

 

 

 

 “, 출구다. 얼른 나가자. 벌써 달이 저만큼 기울었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뒤도 이야기해 줘.”

 

 “그리고 이래저래 일하면서 그림 그리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지. 얘기 끝났으니까 가자. 안 나오면 두고 간다.”

 

 “잠깐만! 아니, 무슨 걸음이 저렇게 빨라? 자화상이 어땠기에 평생 살던 마을까지 떠나? 이와쨩! 아이 참.”

 

 오이카와는 자기를 두고 빠르게 입구로 향하는 이와이즈미를 따라서 급하게 걸었다. 최근 몇 년간 거의 안 움직였더니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피가 빠르게 도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사람이었구나.

 

 이와이즈미는 계단을 올라가다 뒤로 돌아 오이카와가 가까워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거의 뛰 듯이 걸어오다 계단이 가까워지자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계단 앞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이와이즈미는 몇 칸 내려가서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살짝 당겼다.

 

 “다 왔어. 얼른 가자. 너 몸이 완전 얼음장 같아.”

 

 찬바람에 땀이 식었는지 오이카와의 몸이 차가운 것이 느껴져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재촉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못 박힌 듯이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아. 가면 또 그저 예쁜 장식품이 돼야 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에 깍지를 끼며 계단을 한 칸 더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살핀 다음에 오이카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주 올게.”

 

 그제야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입 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약속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한참 서로를 눈에 새길 듯이 바라보던 두 사람은 손을 한 번 꽉 마주 잡았다가 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