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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초상(肖像)

[이와오이, 모브오이] 초상(肖像)_Epilogue; 그리고...

*초상(肖像)의 뒷내용.

*약간의 모브->오이 요소 있음.

 

 

 

 남작은 의자에 앉은 채로 경비병의 보고를 들었다.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턱을 쓸던 그는 적당히 처리하라고 명령한 뒤 경비병이 방을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 눈앞에 놓인 그림을 향해 허리를 굽혀 쳐다보았다. 그림은 자신이 의뢰했었던 오이카와의 초상화였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그림에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림 속의 오이카와는 어딘가 시선을 끌었다. 그래, 마치 그가 오이카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 그런 모습이었다.

 

 길거리에서 그를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빵을 훔치다 걸려 죽을 듯이 맞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그의 더러운 꼴에 남작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소년의 눈빛을 본 순간 남작은 마차를 멈추게 하였다.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자 빵집 주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남작은 상처투성이인 소년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은 그 돈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 해지더니 냉큼 돈을 받아들고는 누가 뺏어가기도 할까 싶어 재빨리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의 먼지를 터는 소년에게 이름을 물었다. 소년은 바닥에 핏덩이를 뱉고는 대답했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

 

 남작은 그대로 소년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인에게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라고 명령한 뒤, 작은 티타임을 가졌다. 그가 자신 앞에 놓인 접시를 거의 비웠을 무렵, 소년이 쭈뼛대며 방으로 들어왔다. 남작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그를 바라보았다. 만족스러웠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남작은 오이카와를 옆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파티가 열릴 때마다 그는 오이카와를 한껏 치장시켜서 데리고 나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으나 그는 무시했다. 남작은 제 옆에 앉아서 사근사근 웃는 오이카와만 볼 수 있다면 그 어떤 소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추악한 소문 따위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오이카와를 어떻게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할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그의 유일한 취미가 제 수집품들을 갈고 닦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남작은 오이카와의 방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옷을 갈아입는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뽀얀 어깨 위로 질 좋은 실크가 걸쳐지고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살짝 보이는 오이카와의 옆모습과 목선을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몸속의 혈액이 빠르게 돌며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그를 만지고 싶단 생각이 들었으나 언제 나타났는지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하인의 목소리에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는 제 소유욕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이카와의 초상화를 의뢰하기로 결심했다. 그를 그림 속에라도 가둬놓으면 조금이라도 제 욕망이 죽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적임자를 길거리 화가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후작은 그 이름 없는 화가를 오이카와에게 소개시켜 준 순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 오이카와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이 봤으나 오이카와가 호감을 표현하는 사람을 처음이었다. 당장이라도 오이카와를 데리고 방으로 가서 그를 가둬놓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가 쥐고 있던 잔과 그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리고 자취를 감췄다 돌아온 오이카와와 그 길거리 화가의 모습을 본 순간 후작은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이카와는 제가 보지 못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서 피어난 자신의 꽃을 보며 배신감을 느꼈다.

 

 초상화를 한참 바라보던 그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온통 새카맣게 칠해진 캔버스에는 새하얀 셔츠를 입은 채로 당당하게 정면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오이카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그림들보다도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후작은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꾹 참고는 하인을 불렀다. 이번에 개최되는 전시회 담당자를 불러달라고 말한 후작은 아까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허무함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 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는 무엇이었을까.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하인이 다시 노크할 때까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든 것들이 피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