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장편/초상(肖像)

[이와오이] 초상(肖像)_Extra; 길에서 태어난 소년

 소년은 이가 떨릴 정도로 추운 날씨에 몸을 더욱 웅크렸다. 아직 겨울도 안 됐는데 더럽게 춥다고 생각하며 굴러다니던 신문지를 잽싸게 주워 벽에 붙은 채로 신문지를 덮었다. 일거리가 있었으면 하다못해 따뜻한 우유라도 사마실 수 있었을 텐데. 날씨가 추우니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아서 길에는 갈 곳 없는 부랑자들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절로 나오는 욕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마찬가지로 신문지나 박스를 덮고 있는 옆 사람에게 좀 더 밀착했다.

 

 다행히 날씨가 좀 풀리자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거리에 활기가 가득하자 일거리도 생기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에게 손짓하는 남자에게 냉큼 다가갔다. 몇 번 자신에게 일을 줬던 남자였다. 그는 오이카와를 데리고 낡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남자가 물감을 준비할 동안 오이카와는 더러워진 몸을 씻고, 빵 몇 조각을 입에 물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깨끗하게 씻은 데다 간단하게 배도 채우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이카와는 남자에게 등을 보이며 앉은 뒤, 제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등 뒤에서 남자가 이제 됐다는 말을 하자 오이카와는 기지개를 피며 굳은 몸을 이완시켰다. 그리고 셔츠를 끌어올리며 캔버스로 다가갔다. 캔버스에는 반쯤 벗은 채로 뒤를 돌아보는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테이블에 놓인 빵 몇 조각을 더 주워 먹으며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모델 일을 하다 보니 여러 화가들이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하나 같이 전부 이질감이 들었다. 항상 저 캔버스 속의 사람이 자기 자신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배를 채우고 하루라도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으면 되었다. 입 안에 든 빵을 우물거리다 삼키자 남자가 익숙하게 허리를 감아 안으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방금 끌어올렸던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날씨는 더 혹독해졌다. 거리는 갈수록 텅텅 비기 시작했으며, 일이 들어오는 날도 거의 없었다. 오이카와는 추위와 배고픔에 이제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가게로 가 빵을 훔쳤다. 안 들켰다면 좋았을 텐데. 오이카와는 육중한 몸의 빵집 주인에게 죽을 듯이 맞으며 점점 뿌옇게 변하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라도 살려고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지만 삶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그래서 빵을 최대한 품에 감싸 안고 이를 악 물며 버텼다. . 갑자기 발길질이 멈췄다.

 

 오이카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뜨거운 물과 향기로운 비누로 몸을 씻어보았다. 욕조에 가득 찬 거품이 신기해 물이 식는 줄도 모른 채로 한참 노는데 갑자기 하녀 몇 명이 들어와 오이카와의 몸을 여기저기 씻기기 시작했다. 수치심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무표정하게 자신을 씻기는 그들을 보자 왠지 모르게 오이카와는 부끄러워졌다. 목욕이 끝나자 그들 중 한 명이 그에게 커다란 타월을 덮어주며 욕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옷 몇 개를 그에게 대 보더니 어느새 다가온 다른 하녀들과 함께 오이카와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처음 입어보는 질 좋은 옷에 천을 만지작거리다 제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꼭 거리의 화가들이 새하얀 캔버스 위에 그리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색한 그 모습에 쭈뼛거리던 오이카와는 하녀의 안내를 따라 고급스러운 문 앞에 섰다.

 

 눈을 뜨면 몸을 단장하는 걸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귀찮고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받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였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치장한 뒤, 남작이 있는 방으로 안내받아 인형처럼 가만히 앉았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의 전부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것은 고문이었다. 하다못해 소일거리라도 주면 좋으련만 남작은 오이카와가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게 했다. 창문 밖의 어딘가를 보면서 멍하게 생각을 했다. 자신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이가 들고 젊음이 사그라지면 그대로 쫓겨나는 걸까. 그럼 그 땐 어떻게 살아야 하지. 울적해진다고 생각할 때쯤 남작이 가까이 오라고 부르더니 옷에 달 장식품을 골라달라고 하였다. 오이카와는 풀어놨던 생각들을 정리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이카와는 우울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행복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길에서 살 때는 작은 빵조각 하나에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왤까. 그러다 오이카와는 창밖의 더러운 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배부른 소리하지 말자. 추위와 배고픔을 그새 잊은 거야? 그는 커튼을 쳐버리고는 창문에서 등을 돌려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풀썩, 옆으로 누워 방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온통 눈을 떼기 힘들게 하는 장식들로 둘러싸인 방을 보며 오이카와는 공허함을 느꼈다. 빵보다도 귀한 것들이지만 그보다도 하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장식품들과 같은 신세인 자신도 쓸모없단 생각이 들었다. 쓸쓸함에 그는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