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장편/초상(肖像)

[이와오이] 초상 (肖像)

 

 *월간 이와오이 1월호 원고입니다.

 *사망소재 주의

 

 

 

 이곳의 겨울은 매서웠다. 비교적 남쪽에 위치해 바다를 마주보고 있던 고향에 비하면 대륙의 겨울바람은 칼날과 같아서 살을 베어낼 것만 같았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어느새 기억이 흐려져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향을 등지면서까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다. 그림.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단 이유만으로 나는 고향과 부모님, 친구들을 모두 등지고 이곳으로 홀로 떠나왔다. 낯선 곳에서 얼마 없는 돈으로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며 돈을 모았다. 자리를 잡아야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에 나는 그 하나만 생각하며 그 어떤 힘들고 더러운 일들도 견뎌내었다. 그렇게 나에겐 작고 낡았지만 화실로도 쓸 수 있는 집이 생겼고, 어느 정도의 물감과 캔버스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선 일감을 줄이고 나는 그림에만 몰두했다.

 

 종이에 감싼 캔버스를 들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날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어떤 귀족이 나에게 의뢰를 맡긴 것이었다. 이 그림에 나의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이것이 그의 마음에 든다면 새 물감을 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그에게 다음 의뢰를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덜그럭 거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그림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연휴가 다가와서 그런지 들떠있었다. 곳곳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려있었으며, 몇몇 가게의 창문에는 좋은 칠면조가 들어왔다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올해 말에 이렇게 일이 들어왔으니 내년부터는 나도 화가로서 돈을 벌며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기대하지 말자. 만약 이 그림이 그 귀족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다 왔습니다, 이와이즈미 씨.”

 

 “, 감사합니다.”

 

 마차가 멈춰서더니 인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차에서 내려 대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긴장감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자 찬 공기에 폐까지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만큼 머리가 맑아지며 자신감이 좀 생겼다. 그래. 여기까지 온 거 이제 이판사판이다. 가능하면 그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지만. 그가 내 그림을 저평가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어. 그냥 여태까지처럼 매일매일 일한 뒤,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림을 그리면 될 뿐이야. 나는 품속의 그림을 좀 더 꽉 안았다. 그러자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을 내딛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겠군. 어서 앉아서 몸 좀 녹이게.”

 

 귀족은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림을 의자 옆에 기대어 놓은 뒤, 그 의자에 앉았다. 옆에선 벽난로가 타닥거리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에 절로 목울대가 움직였다. 곧 조용한 방에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들어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 간단한 간식거리와 차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용히 제 할 일을 마치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이 방엔 그와 나만 남았다.

 “그림은 잘 완성되었나? 저번에 길에서 봤을 때 자네 그림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기대하고 있었거든. 이번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다른 그림도 맡기고 싶네만.”

 

 “,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들고 방 한 편에 놓인 빈 이젤로 다가갔다. 그리고 종이를 벗겨내곤 캔버스를 이젤 위에 얹었다. 귀족은 마시고 있던 차를 내려놓고는 이젤 쪽으로 다가와서 가만히 내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무표정에 손이 계속 떨려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내 인생이 달라질 걸 생각하자 시간이 몹시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곧 죽을 것 같은 적막감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겠는 걸? 자네를 길거리에서 만난 건 행운인 것 같군.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벌써 다른 의뢰도 꽤 받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좋네. 다음 의뢰도 맡기도록 하지. , 여기 이 그림에 대한 값이네.”

 

 그는 만족스럽단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꾸러미를 내밀었다. 언뜻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돈을 받았다. 이 돈이면. 처음으로 내 그림이 인정받았단 사실에 숨이 벅차올랐다. 그러자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엔 초상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초상화라면.”

 

 “, 나 말고. 모델은 나중에 소개시켜주지. 그래, 모델도 소개시켜줄 겸 자네를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해야겠군. 그 때 올 땐 좀 더 멀끔한 복장으로 오게.”

 

 “,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가보게나.”

 

 그는 나에겐 더 이상 볼일이 없단 듯 내 그림을 들어 올리며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나에게 관심을 끈 그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와 닿자 그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 안에 든 묵직한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이 돈으로 당장이라도 값비싼 물감들을 사고 싶었으나 마지막에 그가 한 말이 떠올라 나는 옷가게로 향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 주 정도 남았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인 정장을 걸치고 며칠 전에 받았던 초대장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러자 저번에 보았던 것과 같은 마차가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서 초대장을 펼쳐보았다. 질 좋은 고급종이에 붉게 인장이 찍힌 봉투를 펼치자 은은한 향수냄새와 함께 부드러운 필기체로 쓰인 초대장이 보였다. 초대장에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초대장을 다시 봉투에 넣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먹구름이 껴 어두컴컴했다. 아무래도 돌아갈 때쯤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마차가 멈춰서고,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의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서자 문지기가 초대장을 요구했다. 봉투를 내밀자 그는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인사하였다.

 

 사람과 음식으로 가득 찬 연회장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답게 그의 파티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주변의 여인들에게서 나는 향수냄새에 머리가 아파져 나는 들어온 지 몇 분 만에 발코니로 향했다. 바깥바람을 쐬자 속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역시 이런 파티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 EH한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니 도망칠 수 없었다. 그래, 우선 날 초대해준 그를 만나 인사를 하고, 모델을 소개받은 뒤에 적당히 배를 채우며 시간을 때우다가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견딜만해 졌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를 찾는 건 쉬웠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으로 향하면 됐으니까. 날 발견한 그에게 고개를 숙이다 문득 그 옆의 사람에게 눈이 갔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사람들을 적당히 물리고 나에게 다가온 그는 그간 잘 지냈냐며 몇 가지 안부 인사를 건네다가 자신의 옆 사람에게 향하는 내 눈을 보았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내가 소개를 깜빡했군. 이쪽은 오이카와 토오루네. 자네가 그려줬음 하는 모델이지. 오이카와, 여긴 이와이즈미 하지메 군이야. 널 그려줄 화가란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사람에게 홀려 있다가 그가 내민 손에 놀라 두 손으로 그 손을 붙잡아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가 작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잘 부탁드려요.”

 

 “? .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데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찾았다. 허리에 두른 손. 그들은 딱히 자신들의 관계를 밝히진 않았으나 그 손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귀족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었단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다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그 사람, 그러니까 오이카와에게 나와 이야기를 해보라며 말하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걸어갔다.

 

 “긴장 풀어요. 그 옆에 있긴 했지만 나는 귀족이 아니니까요.”

 

 “?”

 

 “몇 년 전에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다 걸리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죽을 듯이 맞고 있었는데, 마침 그 때 저 분이 지나가다 절 구해주시곤 거둬 주신 거예요.”

 

 “.”

 

 “전 그냥 당신의 그림과 같은 존재에요. 그저 갖다놓고 감상하는 그런 존재. 다들 절 사물 취급해서 답답했는데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이곳 사람들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니까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내 넋 나간 표정을 보더니 웃었다.

 

 “그 쪽도 답답하신 것 같은데 우리 정원에 가서 바람이라도 쐴까요? 어차피 이 저택 곳곳에 경비병들이 있어서 저희끼리 나가도 딱히 신경 쓰시진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저택의 뒤편에 위치한 정원으로 향했다. 해가 저물어서 그런지 짙은 빛깔의 정원은 살짝 으스스하게 느껴졌으나 내 옆에 서 있는 그 덕분인지 꽤 있을만했다. 가만히 서서 아까완 달리 밝게 빛나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그가 내 손을 이끌었다.

 

 “저번부터 저기 꼭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같이 들어가요.”

 

 “

 

 그는 갑자기 내 손을 이끌어 거대한 정원의 절반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미로로 향했다. 수풀로 만들어진 미로는 어두컴컴해서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나 어디서 들고 왔는지 촛불까지 들고 상기된 얼굴을 한 그를 보자 거절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곤 그의 손에 이끌려 캄캄한 미로 속으로 발을 들였다. 막 미로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의기양양하게 앞서 걸었으나 몇 번이나 막다른 길에 가로막히자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촛불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몸은 추위에 점점 굳어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떡하지.”

 

 “대책 없이 막 걸을 때부터 알아봤어.”

 

 “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막 걸으니까 길을 잃지. 널 따라서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럼 넌 여기서 나가는 방법 알아? 아니까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가 앞장서.”

 

 그와 나는 씩씩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숨을 죽였다. 놀란 얼굴을 한 그는 막다른 길이었던 구간에 숨었고 나도 그 옆으로 따라 들어가 몸을 낮췄다. 우리는 그렇게 수풀에 기대어 쭈그려 앉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남녀의 것이었다. 우리처럼 미로에 들어왔는지 그들은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옷가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곧 무슨 행위를 하는지 짐작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미로가 이런 장소로도 쓰였던 건가. 낯 뜨거운 소리에 한숨을 쉬며 옆을 힐긋 보자 터질 것 같이 새빨간 얼굴을 한 그가 보였다.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가 먼저 움직였을까, 아니면 내가 먼저 움직였을까. 입술이 맞닿았다. 숨결이 얽혔다.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졌다. 그가 내 목에 팔을 둘렀고, 나는 그의 뒤통수를 붙잡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가 수풀너머의 그들의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 풀 때문에 손이 간지러워 입술을 잠시 떼어냈더니 어느새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타 이었다. 그는 모자랐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예전에 들은 것이 떠올랐다.

 

 “미로에서 어떻게 나가면 되는지 기억났어.”

 

 “지금 그게 중요해?”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옷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가 풀밭에서 밤하늘로 바뀌었다. 이제 내 위에 올라탄 오이카와는 내 얼굴을 붙잡더니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다가 다시 혀를 얽어왔다. 그는 하반신을 나에게 비비며 잔뜩 열 오른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입맞춤에 열중한 그의 얼굴 너머로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갖고 싶은데 거기에 닿지도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가 냉정을 되찾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의 얼굴을 간신히 떼어내곤 헝클어진 그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의 두 눈은 젖은 채로 불만을 표하고 있었고, 두 뺨은 발그레 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나와 닿아있던 입술은 어느새 부풀어올라있었다. 나는 목에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빼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미로에 갇혔을 땐, 오른손을 옆으로 내밀어서 벽을 짚으며 계속 걸으면 된대.”

 

 “그냥 날 밝을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그럼 누군가는 우릴 찾으러 오겠지. 그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자.”

 

 “가자.”

 

 일어나지 않으려는 그를 겨우 일으켜 세우자 그는 내 목을 끌어안으며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 나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밀어내고는 오른손을 들어 벽을 짚으며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달이 꽤 움직였다고 생각할 때쯤 우리는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다 왔어. 얼른 들어가자. 너 몸이 완전 얼음장 같아.”

 

 “가고 싶지 않아. 가면 또 그저 예쁘기만 하면 되는 장식품이 돼야 하는 걸.”

 

 “자주 올게. 그 분이 나보고 널 그려달라고 했으니까 직접 보며 그리고 싶다고 하면 자주 찾아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가자.”

 

 “약속이야.”

 

 “.”

 

 겨우 오이카와를 달래서 연회장으로 돌아가자 귀족은 기다렸단 듯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에 오이카와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릴 건지 얘기하고 왔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초상화란 본디 그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도 반영이 됩니다. 그러니 며칠에 한 번이라도 직접 모델을 보며 그릴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귀족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뭐라 말하는 것 대신에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이카와를 데리고 멀어졌다. 오이카와는 힐끔 뒤를 돌아보려했다. 그러나 귀족이 그를 쳐다보는 바람에 애매하게 시선이 엇갈렸다. 오이카와는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웃으며 눈을 돌렸다. 나는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촛불을 켜고, 새 캔버스를 꺼내왔다. 다음에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기억이 생생할 때 그를 캔버스에 담고 싶었다. 그 날은 초를 두 번이나 갈 때까지 자지도 않고 그림을 그렸다.

 

 다시 그 저택에 간 것은 며칠 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나는 캔버스와 물감, 붓을 제대로 챙겼는지 확인하고는 이젠 제법 익숙해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타자 설레는 마음에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곧 마차가 멈추고 나는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로 향할 줄 알았는데 하인이 고개를 저으며 계속 따라오라고 말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 하인은 저택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 앞에 멈춰서더니 노크를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오라고 명했다. 하인은 비켜서며 인사하곤 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땀이 찬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침대 바로 앞에 놓인 이젤에 캔버스를 올리고 그림을 그리려니까 자꾸 선이 떨려와 선이 고르지 못했다. 등 뒤에선 귀족이 내가 제대로 그리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오이카와가 알몸인 상태로 붉은 밧줄에 묶여있었다. 하반신은 이불로 덮여있었으나 그의 붉게 달아오른 몸과 얼굴을 보자 이불 아래는 어떤 상태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베개 위로 오이카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고, 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태인지 종종 신음하며 이를 꽉 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눈가는 이미 눈물로 짓물러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한다면 다시는 오이카와를 못 만날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팔레트를 쥔 왼손에 힘을 꽉 주며 그림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다.

 

 “초상화에는 그 인물의 내면이 담긴다고 했지. 부디 자네의 그림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저 귀족에게 이것은 하나의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겠지. 나는 그 말에 그를 바라보곤 고개를 꾸벅인 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 말을 들으니 어떤 그림을 그려야할지 확신이 섰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오이카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붓을 고쳐들었다. 나는 물감으로 캔버스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귀족이 들고 있는 모래시계의 모래는 계속해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됐군. 나머지는 내일 다시 와서 그리도록 하지.”

 

 “, 그럼 내일.”

 

 나는 붓과 물감을 정리한 뒤, 캔버스를 조심스럽게 종이로 감쌌다. 오이카와는 중간에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캔버스를 끌어안은 채로 재빨리 저택을 나왔다. 조금이라도 저 곳에 더 머물렀다간 돌아버릴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는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오늘은 가는 길에 술을 좀 사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자 종이에 싸인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을 고쳤다. 이걸 내 생의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려면 시간은 아무리 넘쳐나도 부족해진다. 나는 곧장 마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그 후로 매일 몇 시간씩 이런 만남이 이루어졌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묶여 괴로워하고, 나는 그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 귀족은 침대에서 좀 떨어진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그러다 어느새 12월의 마지막 날일 되었다. 분명히 오늘 파티가 있다고 들었는데도 나를 부른 그의 저의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며칠 동안 다녀 익숙해진 복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어쩐 일인지 그가 없었다. 그저 오이카와만이 침대에 묶여있을 뿐. 내가 의아해 하는 것이 느껴졌는지 하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연회에 참가하시기 때문에 오늘은 두 분이서만 마저 진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얼떨떨했으나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난 곧장 들고 있던 것을 던지며 침대로 향해 오이카와를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끈이 풀리자마자 오이카와는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는 내 입술을 찾았다.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한동안 숨이 차오를 때까지 서로의 혀를 얽었다. 고작 몇 주 전에 처음 만난 사인데도 오이카와의 체취를 맡자 꼭 집으로 돌아 온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뗐다가 가볍게 입을 다시 맞추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오이카와를 가만히 안고 있자 문득 그림이 떠올랐다. 오이카와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열심히 그렸던 초상화.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오이카와를 떼어내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캔버스를 들고 왔다. 이젤을 침대 쪽으로 돌리고 종이를 벗겼다. 그리고 캔버스를 이젤에 얹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있다가 그림을 보곤 놀란 눈으로 다시 캔버스를 천천히 훑었다.

 

 “어때?”

 

 오이카와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댔다. 순간 갑자기 누가 들어오면 어떡하나 불안했으나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오이카와를 보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떼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이카와의 등을 토닥여 주다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걸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번 운명에 맡겨볼까.

 

 “오이카와, 우리 도망치자.”

 

 “?”

 

 “내 고향에 가자. 여기서 좀 머니까 거기로 가는 배만 타면 우릴 더 이상 찾지 못할 거야. 비록 어촌에다가 큰 마을도 아니지만 여기보다 따뜻하고 마을 사람들도 다 좋아. 같이 가서 살자.”

 

 “하지만. 그림은? 그림 그리려고 여기 왔댔잖아. 그리고 만약 실패하면.”

 

 “그림은 고향에서도 그릴 수 있어. 굳이 그걸로 먹고 살지 않아도 되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가자. 나랑 가자, 오이카와.”

 

 “…….”

 

 혼란스러운지 그의 눈은 갈피를 못 잡았다. 나는 그런 오이카와를 침대에 앉히고 방에 있는 옷장을 열어보았다. 옷가지 몇 개가 있었다. 적당해 눈에 안 띌 셔츠와 바지, 그리고 외투를 꺼내서 오이카와에게 다가갔다. 옷을 내밀자 그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옷을 받아들었다. 불안해 보이는 오이카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마에다 가볍게 입을 맞추곤 테라스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1층에 위치한 방이라 탈출은 비교적 쉬워보였다. 오이카와는 어느새 옷을 다 입었는지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

 

 그 모습이 이상하게 너무 위태로워 보여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나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내가 내민 손을 꽉 붙잡았다.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꽉 잡고는 테라스의 난간을 넘었다. 건조한 풀이 발에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디로 나가야 하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저택의 구조고 뭐고 아무 것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내가 난감해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내 손을 이끌고 앞장섰다. 그는 어느 정도 걷다가 제법 가까이서 들리는 발소리에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경비원들 몇 명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곧 경비원들이 사라지고 오이카와는 나를 데리고 담벼락 근처의 수풀로 갔다. 거기서 벽을 따라 좀 걷자 제법 낮은 벽이 나왔다. 오이카와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담을 넘으려는 그를 저지하곤 조심스럽게 담에 올라탔다. 다행히 건너편은 아무도 없는 뒷길이었다. 담에서 뛰어 내리자 오이카와도 담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전에도 도망쳐본 적 있어?”

 

 “. 비록 실패했지만. 이쪽이야.”

 

 오이카와는 나를 스쳐지나가며 앞서 걸었다. 어두컴컴한 길을 오로지 달빛에만 의지해서 헤쳐 나갔다. 곧 수풀이 줄어들고 점차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택 뒤에 있는 언덕 쪽으로 나와 마을로 향하는 길인 것 같았다. 마을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불이 켜져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오이카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몇 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네.”

 

 “이 쪽이야.”

 

 나는 오이카와의 손을 붙잡고 항구 쪽으로 향했다. 이대로 항구까지 가서 해가 뜨자마자 출발하는 배를 타기만 하면 이곳과는 영영 안녕이다. 나는 문득 내 화실이 떠올랐다. 나의 모든 것이었던 그 곳. 나는 오이카와의 손을 꽉 붙잡으며 빠르게 걸었다. 곧 바다가 보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바다는 어둠을 삼킨 채 새카맣게만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곧 선착장을 지키는 사람의 오두막이 보였다. 나는 급하게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늙은 노인이 잠에서 막 깬 듯한 얼굴로 문을 열며 나왔다.

 

 “제일 빨리 출발하는 배를 타고 싶은데요.”

 

 “젊은이, 몇 시간 뒤면 새해인데 누가 아침 일찍부터 배를 띄우겠나. 적어도 오전은 돼야 배가 올 걸세.”

 

 “급한 일이라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자 머리 위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이는 손이 느껴졌다.

 

 “알겠네. 내 어부들에게 한 번 연락해 보겠네. 대신 뱃삯은 충분히 준비해야 할 걸세.”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네. 그럼 이따 해가 뜨거든 오게나.”

 

 나는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멀찍이 서 있는 오이카와에게 갔다. 그는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가까워지는 걸 알아챘는지 급하게 입술에서 손을 뗐다. 불안한 기색을 보여주기 싫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이카와, 배를 타려면 돈이 필요해. 마침 내 방이 이 근처니까 얼른 가서 가지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같이 가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아니, 둘 보단 혼자 움직이는 게 더 빠르니까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 여기 이거 두르고 있어.”

 

 나는 내 겉옷을 벗어서 오이카와에게 둘러주었다. 아까 얼핏 만진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서 이대로 두고 갔다간 감기에 단단히 걸릴 게 분명했다. 내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오이카와를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곳에 데려다 주었다. 그는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겁에 질려서인지 덜덜 떨고 있었다. 등 뒤에서 희미하게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뗐다.

 

 “갔다 올게.”

 

 끝까지 붙잡는 오이카와의 손을 뒤로 하고 나는 내 방으로 달렸다. 그 동안 모아둔 돈 주머니와 두꺼운 옷 몇 벌을 챙겨서 나오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추위에 점점 굳어가는 발을 열심히 움직였다. 저 멀리에 익숙한 집이 보였다. 조금만 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조금만 더.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두 칸, 세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자 낡은 나무문이 보였다. 열었다. 그러자 친숙한 물감 냄새가 확 다가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급하게 가방을 꺼내 두꺼운 옷과 돈주머니를 챙겨 담았다. 더 가지고 갈 것이 없나 둘러보다 그 동안 쓰던 붓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이다 붓도 챙겨서 나왔다. 올 때와 같이 빠르게 달렸으나 이상하게 항구로 가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수평선은 어째선지 쉬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손끝과 발끝이 아려왔으나 그 감각도 무시한 채로 달렸다. 저 시커먼 바다를 마주하며 혼자 있을 오이카와를 생각하자 아픔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심장이 죽을 듯이 뛰어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분명 달려서 그런 걸 거야. 아무리 내 자신을 달래보아도 추위와 함께 머릿속을 장악한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침묵 속의 소란스러움. 내가 있는 마을 쪽은 고요한데 왜 오이카와가 있을 항구 쪽은 소란스러울까. 왜 불빛이 보이는 걸까. 왜 불빛에 반사돼 번쩍이는 날들이 보이는 걸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달릴 뿐. 오이카와를 향해 뛰어야한단 것 말곤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나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오이카와는 그 귀족의 사병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불안정한 오이카와의 눈동자. 나를 보며 움직이는 그 입술. 도망쳐. 도망쳐, 빨리. 내 귀엔 오로지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처럼 나를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오이카와. 일렁이는 물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신을 차리자 병사들의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이 시큰거리고 눈도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눈꺼풀 위로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어디 있지? 힘겹게 눈을 떠 오이카와를 찾았다. 시야가 흔들려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울고 있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다행이다. 멀쩡했구나. 잠시만. 아니다. 흐린 시야로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오이카와를 보자 그의 발목 부근이 피투성이였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 피가 오이카와의 것이 아니길 바라며 그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밧줄에 묶인 몸은 꿈쩍도 안 했다. 자세히 보니 배를 묶어 놓는 기둥에 묶여 있었다. 몇 번이나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얻어맞은 데다 밧줄로 꽉 묶인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서 저 눈물을 닦아주며 괜찮다고 해줘야 하는데.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불러주어야 하는데. 바싹 마른입은 그저 쇳소리만 낼 뿐 그 이름을 완성하지 못했다. 철컥. 무언가 묵직한 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왜 저 소리는 유독 선명하게 들리는지. 절망감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눈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새해가 밝았다. 등 뒤로 발간 올해의 첫 해가 떠오른 게 느껴졌다. 저절로 탄식과 함께 울음이 섞인 웃음이 나왔다. 너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싶었는데.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나겠구나. 오이카와. 고개를 들자 총구가 겨눠진 게 보였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이 실감되었다. 머리를 살짝 흔들자 시야가 아까보다 더 뚜렷해졌다. 오이카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죽는 것보다도 내가 죽은 다음 오이카와가 어떻게 될지가 더 두려웠다. 나와 그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웃어보았다. 떨리는 입 꼬리가 당겨왔다. 그리고.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한 발의 총성이 더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