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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후타오이] 어쩌면

*후타→오이→이와

 

 

 

 

 그 날, 아오바죠사이 고교 근처에 가게된 건 순전히 심부름 때문이었다. 모임이 있으니 대신 이모에게 반찬 등을 가져다 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대충 코트를 걸치고 식탁 위의 종이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모에게 봉투를 건네고 나오는데 문득 이 근처에 세죠가 있단 게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 하나.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말이라 닫힌 문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순 없었지만 교문 너머로 보이는 교정은 깔끔해 보였다. 잠시 이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다닐 그 사람을 떠올리다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 낯선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는 그 사람을 보았다.

 

 “오이카와?!?”

 

 마주칠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러버렸다. 그러자 그 사람이 돌아보았다. 놀랐는지 커다래진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나는 묘하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표정.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곤란하게 될 걸 알면서도 나는 그의 표정을 보자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에게 다가가 옆의 빈 그네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위로해 주는 거야?”

 

 “그렇다고 해두죠.”

 

 “상냥하네. , 좋아. 말하면 개운해 질 수도 있으니까 말해줄까. 그게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애인이 생겼어.”

 

 “?”

 

 “의외란 얼굴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의외야. 나도. 걔도.”

 

 두 손을 모은 채로 꼼지락거리더니 그는 그네에서 일어서서 타기 시작했다.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그네가 끼익, 끼익. 위태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을 공중에서 왔다 갔다 한 그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땅에 착지했다. 날이 추웠다. 나에게 등을 보이고 선 그에게서 새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 얇은 그의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안 추워요?”

 

 “? , 그러고 보니 좀 춥네.”

 

 그는 손을 비비며 뒤를 돌더니 멋쩍은 듯 웃었다. 나도 그네에서 일어섰다. 옆에 그가 타고 있던 그네는 여전히 앞뒤로 움직이며 불안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 때문일까. 유독 그가 아슬아슬해 보여 나도 모르게 다가가서 팔을 붙잡아 버렸다.

 

 “, 그게.”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어디 가던 길 같던데, 이제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습관인걸까. 계속 웃고 있는 얼굴이 거슬렸다. 그만 웃었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왜 웃어요?”

 

 아, 실수. 생각이 입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내 말에 어느새 언제 웃었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피곤만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해?”

 

 말문이 막혔다. 내가 주제넘었던 건가. 그래도. 그래도 웃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를 끌어당겨 내 어깨에 얼굴을 묻게 했다.

 

 “모르겠어요. 근데 웃진 마요. 별로에요.”

 

 “내가 웃는 게 별로야? ? 못생겼나?”

 

 “아뇨, 그건 아닌데. 뭐라 해야 하지. 그냥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어요.”

 

 가만히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등을 토닥여주자 잘게 그가 떨기 시작했다. 아마 내 코트의 어깨자락이 젖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내 옷자락을 꽉 쥔 채로 울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찬바람이 불자 그의 시원하면서도 단 것 같은 체취가 느껴지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스쳐서 그런지 자꾸 몸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그리고 점차 떨림이 잦아드는 등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오늘, 참 이상한 날이다. 그도. 나도.

 

 한참 있으니 코를 훌쩍이면서 그가 떨어졌다. 그의 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한 그는 살며시 웃었다. , 그가 말한 사람이구나. 나는 그가 뒤로 돌아 전화를 받을 때, 액정에 뜬 이름을 보았다. 등번호가 4번이었던가. 그가 좋아한다는 사람은 의외이면서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언제 울었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그의 옆모습은 나에게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내 어깨에 기대 울던 그가 갑자기 너무나도 멀게 느껴져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

 

 이를 꽉 깨물며 간신히 정신을 붙든 다음, 이만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가 내 팔을 잡아왔다.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입모양으로 말하더니 몇 마디를 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가자.”

 

 “어딜요?”

 

 “편의점. 나 위로해준 보답.”

 

 그가 내 팔을 잡고는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따뜻한 음료 두 개와, 탄산 두 개, 그리고 과자 몇 봉지를 카운터에 올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뇨. 딱히.”

 

 “, 그럼 이것도 주세요.”

 

 그는 카운터 근처에 놓인 작은 봉지들 중 하나를 들어서 계산대에 놓았다. 봉지에 물건들이 담기고, 그는 계산을 했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던 나에게 다가왔다. 딸랑. 편의점 문에 달린 종이 울리고, 다시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왔다.

 

 “, 이거. 집에 가는 길 추울 거 아냐.”

 

 그는 아까 산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잠시 캔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받아들자 그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내밀어지는 손.

 

 “이건 가는 길에 심심할 것 같아서 주는 선물.”

 

 아까 마지막으로 골랐던 작은 봉지였다.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는 봉지엔 과일 맛 젤리가 담겨져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는 친절하게 봉지를 쥐어주었다.

 

 “그럼, 잘 가.”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겠지. 소식이야 계속 배구를 한다면 얼핏 들을 수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를 잡았다.

 

 “?”

 

 아직까지도 빨간 코끝이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도저히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 입만 뻥긋거리다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다 문득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봉지가 눈에 띄었다. 음료수 두 개와 과자 몇 봉지. . 힘이 탁 풀렸다.

 

 “이거 고맙다고요.”

 

 나는 손에 든 젤리 봉지의 끄트머리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싱겁다는 듯이 웃고는 뒤로 돌아 멀어졌다. 그리고 골목을 돌아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 그 자리에서서 손에 든 캔 커피와 젤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봉지를 뜯어 젤리를 하나 입에 넣었다. 찬 공기 때문인지 젤리는 단단했다. 몇 번 입 안에 넣고 굴리자 그새 말랑말랑해진 젤리를 두어 번 씹다 삼켰다. 달그락. 그렇게 삼킨 젤리는 위장이 아니라 가슴 속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마치 작은 돌 하나가 텅 빈 가슴 속을 굴러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거슬려 이번엔 캔 커피를 따서 들이마셨다. 한 번에 캔을 다 비우자 이번엔 가슴에 파도가 밀려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과 배 그 중간쯤에서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제기랄.

 

 빈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자 손에는 아직 내용물이 많이 남은 젤리 봉지가 들려있었다. 버릴까.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봉지를 꽉 쥔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돌렸다.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나는 여전히 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것 같은 작은 물체를 떠올렸다. 이건 젤리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