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후타오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미래 날조

*'어쩌면' 이후

*for 요한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바로 취직을 했다. 나는 그냥 동네의 작은 카센터에서 일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사람은 자고로 수도로 가야 한다며, 나를 도쿄로 보내셨다. 그래서 지금은 독립해서 도쿄에 있는 카센터에서 일하는 중이다. 역시 수도라서 그런지 사람이 정말 많았다. 게다가 카센터도 제법 크고 인지도도 높은 곳이어서 그런지 하루에 수리해야할 차량 대수도 많아 몇 년 간 정말 정신없이 일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카센터 앞을 지나가는 고등학생 한 무리를 보았다. 져지를 입은 채로 익숙한 공을 들고 걷는 그들을 보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코트 위에서만큼 열성적이었던 때가 있었을까.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때가 그리워졌다. 손에 끼고 있던 기름때가 묻은 장갑을 벗고 정비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인터넷 아이콘을 누르자 자주 쓰는 포털 사이트가 떴다. 그리고 여태껏 못 잊은 그 이름을 검색창에 써 보았다.

 

 “아무도 없나요?”

 

 사무실 창 너머로 자동차 한 대가 카센터 안으로 들어와 멈춰 서더니 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점심시간이라 다른 직원들은 자리를 비웠기에 어쩔 수 없이 보고 있던 화면을 끄고 장갑을 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

 

 “? 오랜만이야. 여기서 일 하나 봐?”

 

 “, .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방금까지 화면에서 봤던 얼굴의 그가 차 옆에 서 있었다.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는데. 살이 조금 빠졌나. 왠지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차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네. 떨림도 심한 것 같고.”

 

 “, 잠시만요. 여기 이것 좀 작성해 주세요.”

 

 그가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자동차 보닛을 열어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수리는 금방 끝날 것 같았다. 아니, 다행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그냥 부품만 좀 교체하면 될 것 같아요. 바로 교체해 드릴까요?”

 

 “, 부탁할게. 어디 가던 중이라서.”

 

 “그럼 그 다음 장도 작성해 주시면 되요.”

 

 “응응.”

 

 그에게 신경이 쏠려 있어서 그런 걸까. 유독 종이에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부품을 빼내다가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글을 쓰는 데에 집중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몇 년 사이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가 바뀐 것 같아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눈을 접어 웃었다.

 

 “뭔가 홀가분해 보이시네요.”

 

 “, 역시 넌 알아보네.”

 

 “고백하셨어요?”

 

 “아니.”

 

 “그럼?”

 

 “결혼했어. 그 사람.”

 

 입 다물고 부품이나 교체할 걸. 괜히 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빼냈던 부품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서류철을 내밀었다. 서류철을 받아들고 작업대 한편에 부품과 함께 얹은 뒤, 새 부품을 갈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교체됐는지 점검하는데 예전에 그에게 받았던 젤리가 떠올랐다. 그대로 버리지도 먹지도 못한 채로 책상에 넣어뒀던 그 젤리. 여태껏 애써 무시했던 작은 돌이 다시 가슴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갈증이 느껴져 침을 삼켰으나 소용없었다. 그래서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서 그를 바라보았다.

 

 “다 끝났어?”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 인터뷰. 잡지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언제쯤 마쳐요? 저 간만에 만났으니까 밥 사주세요.”

 

 “오늘? .”

 

 “뒤에 약속 있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저 오늘 오후 4시에 마쳐요.”

 

 아까 작업대에 올려 두었던 서류철 중 빈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뒷면에 내 전화번호를 적은 뒤 찢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제 번호니까 연락해요.”

 

 그가 당황했는지 내 얼굴만 쳐다보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에 종이를 직접 쥐어주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얼른 사무실로 향했다. 아마 이렇게 하면 그는 수리비 때문이라도 분명히 다시 돌아 올 것이다. 나는 초조하게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이 움직일수록 손에 땀이 배어났다. 벌써 작업복은 벗은 지 오래였고, 휴대폰의 시계만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동료들이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4시 16. , 정말 안 오려나. 괜히 계속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 하는데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켄지! 누가 너 찾는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뛰어나가려다 괜히 기다린 게 티 나는 것이 싫어서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채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작은 돌이었던 것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어느새 내 가슴 속에서 터질 듯이 부피를 키워 감당이 되지 않았다. 나는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겨우 조수석에 올라탔다.

 

 “뭐 먹고 싶어?”

 

 “뭐든 좋아요. 평소에 자주 가시는 곳이라면.”

 

 “재밌네.”

 

 그가 작게 웃으면서 핸들을 돌렸다. 차는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핸들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박자에 맞춰 까닥거리며 유행이 지난 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아하는 곡일까? 한 번도 끝까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지만 앞으로 많이 듣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어느새 차를 어떤 가게 앞에 주차시키고 있었다. 후진을 하느라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선에 가슴이 떨려왔다. 차안 가득 느껴지는 그의 체취에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손을 말아 주먹을 꽉 쥐었다.

 

 “, 다 왔어. 집 밥이 먹고 싶을 때 자주 오는 곳인데, 메뉴가 전체적으로 맛있어서 좋아.”

 

 가게는 작고 수수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이미 가게 주인과 안면을 튼 사인지 그는 반갑게 인사하며 주인과 이야기 하다가 메뉴판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메뉴를 대충 훑어보다가 그냥 그가 주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먹겠다고 말하며 메뉴판을 덮었다. 그는 내 말에 아무 말 없이 빙긋이 웃다가 주문을 했다. 이른 저녁시간대라 가게에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음식은 금방 나왔다. 깔끔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나는 밥을 먹다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혹시 그와 내가 인연이 아닐까 라는 기대감에 괜히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맛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살포시 웃고는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딘가에서 단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서 있었다.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과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음료수는 제가 살게요. 그리고 이 근처에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는 이 상황이 재밌단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근처의 카페로 들어가서 커피 두 잔을 사서 나왔다. 그러나 가게 앞에 서 있던 그는 보이지 않았다. . 가버린 건가. 멍청하게 가게 앞에 서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왠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바보, 가 버린 줄 알았지?”

 

 갑자기 볼을 찌르는 손가락에 놀라서 돌아보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내 손에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가져가더니 빨대를 입에 물었다.

 

 “차 좀 더 주차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나왔어. 산책하자며?”

 

 아. 바보 같다, 정말. 그의 차가 주차돼 있단 걸 깜빡했다. 내가 그에게 안달한단 걸 들킨 것 같아 얼굴에 열이 몰렸다. 나는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봐 재빨리 앞장서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아직 해는 서쪽 끄트머리에 걸려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원에 도착하자 한적하게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가족단위로 나온 사람들 등이 보였다. 그와 나는 사람이 적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공원 곳곳에는 꽃들이 심겨져 있어 바람에 꽃향기가 섞여서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아직도 배구를 하는지, 이번 여름휴가 때 무얼 할 건지와 같이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대화를 했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줬던 젤리는 다 먹었어?”

 

 “...하나만.”

 

 “? ? 젤리 싫어해?”

 

 “그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오히려 그 날 이후로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 젤리가 되었단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잊자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계속 그 새콤한 맛을 잊을 수 없어 젤리를 사먹었고, 그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사준 젤리만큼은 그 이상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책상 서랍에 그대로 넣어두었다.

 

 “.”

 

 그는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걸어오자 길을 터주기 위해 내 쪽으로 붙었다. 그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더 줄어들었다. . 그와 나의 손등이 스치자 나는 감전된 것 마냥 쭈뼛거렸다. 나도 모르게 맞잡을 뻔 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커피를 마셨다.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았으나 그냥 차가운 음료에 머리가 진정될 때까지 마셨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커피로 진정이 되자 화면에 뜬 발신인이 보였다. 그 사람이었다. 이제는 결혼했다던 그의.

 

 “아직도 그 사람 좋아해요?”

 

 “…….”

 

 그는 내 물음에 답장을 하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피식 웃더니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 그는 아직도.

 

 “정리하려고 하는데 십몇 년 된 감정이라 그런지 내 마음대로 잘 안 되네.”

 

 “…….”

 

 이번엔 내 쪽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와 나 사이엔 한동안 말없이 빈 컵의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어느새 산책로를 따라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입구가 보였다. 그는 공원 중앙에 놓인 시계를 보더니 이만 돌아가자며 들어올 때와 달리 먼저 공원을 나섰다. 가게 앞에 놓인 차로 향하는 내내 그와 나는 말이 없었다. 그는 차키를 꺼내서 문을 열었다.

 

 “태워다 줄게. 집이 어디야?”

 

 “괜찮아요. 여기 바로 앞에 전철역이 있거든요. 오늘 밥도 사주셨는데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저녁 감사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 또 보자.”

 

 나는 그의 차가 가게를 벗어나 신호를 받고 멀어지는 것까지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자 역이 보였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손에 들고 있던 빈 컵을 알아차렸다. 어느새 얼음이 녹아 물이 생겨 있었다. 나는 잠시 컵을 바라보다가 근처의 쓰레기통에 넣고는 전철을 타러 역에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그가 줬던 젤리 봉지를 꺼냈다. 봉지 속에서 젤리는 서로 엉겨 붙어서 처음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쓰레기통 앞에 젤리를 버리기 위해 섰다. 바라봤다. 쓰레기통과 젤리를 번갈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이까짓 게 뭐라고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지. 갑자기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대로 잘 안된다던 그 말이 이해가 갔다.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든 젤리 봉지를 꽉 쥐며 일어선 뒤, 열려있는 책상 서랍에 다시 봉지를 넣고 닫았다. 그리고 불을 끄고 방에서 나왔다. 걸을 때마다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때 먹었던 젤리가 아직도 내 속을 긁으며 쓰라리게 했다.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오이] 생일날 아침  (0) 2017.01.27
[시라오이] What a Waste of a Lovely Night  (0) 2016.12.25
[후타오이] 어쩌면  (0) 2016.12.23
[카게오이] 망설이지 마세요  (0) 2016.12.19
[이와오이] For a Thousand Years  (0) 2016.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