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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오이] 이 계절이 지나면, 下

*전편

 

***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맛있는 음식에 앞에 누가 앉아 있었는지도 까먹은 채로 열심히 밥을 먹었다. 내 취향일 거라더니 정말 딱이네.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깨끗하게 빈 그릇 옆에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표정을 관리했다.

 

 “, 먹을 만은 하네.”

 

 “맛있으면 맛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기어오르지 마, 토비오 쨩.”

 

 아차.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나온 옛 호칭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표정에 홀려 따라온 것을 후회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짐을 챙기곤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한 발짝 더 빨랐다.

 

 “오이카와 씨가 불러주시는 그 호칭, 너무 그리웠어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쟤가 내가 알고 있던 그 토비오 쨩이 맞는 걸까. 그는 잠시 카게야마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오이카와 씨는 제 생각 한 적 없나요?”

 

 “…….”

 

 오이카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다 대고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카게야마가 떠올라 힘들었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둘이 있을 때도 벅찼던 감정은 혼자가 되니 더 감당하기 힘들었고, 그럴 때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제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괜찮아지기 위해 그는 부단히 노력을 했다. 상담과 재활 치료를 꼬박꼬박 나가고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인생 설계도 다시 세우는 등 오이카와는 현재와 미래에 맞서 다시 한 번 일어섰다.

 

 “한 번도 없나 보네요. 하긴 선배는 강한 사람이니까요.”

 

 “…….”

 

 “?”

 

 “아니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게야마가 놀란 눈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변화가 무서웠다. 사고가 나고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한 뒤로는 무언가를 바꾸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불편해도 안경을 쓰지 않았으며, 이사를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살던 방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젠 괜찮을 것 같았다.

 

 “나도 네가 그리웠어.”

 

 변화가 늘 부정적인 결과만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두려워도 그것에 직면하기로 결심했다. 사고가 나서 상황이 변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배구를 관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변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카게야마를 다시 마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굴곡진 인생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시련들에 굴복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오이카와 토오루이기에, 오이카와는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토비오 쨩. 안 그랬으면 다시 일어서는 법을 몰랐을 거니까.”

 

 “오이카와 씨, 그럼.”

 

 “그나저나 토비오 쨩, 이젠 낯간지러운 소리도 곧잘 하네. 언제 이만큼 컸대. 역시 이 오이카와 씨가 대단해서 그런 건가? 그 토비오 쨩이 저런 소리도 하게 만들다니.”

 

 카게야마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오이카와의 말에 점점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

 

 

 “토비오 쨩, 빨리빨리 좀 움직여 봐.”

 

 “저 열심히 옮기고 있는데요. 놀고 있는 건 오이카와 씨잖아요.”

 

 “무슨 소리야? 토비오 쨩, 다시 나가고 싶어?”

 

 “여기 제 집이잖아요.”

 

 “조용히 해. 너 요즘 너무 건방진 것 같아. 아무래도 다시 교육을 시키든지 해야지.”

 

 오이카와는 상자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바닥에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다시 상자 하나를 들고 안쪽으로 옮겨 놓고는 땀을 닦았다. 오늘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집으로 이사를 온 날이었다. 카게야마는 허전하던 자신의 집 곳곳에 오이카와의 물건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는 슬쩍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 깜짝 놀랐잖아요. 짐 정리는 어쩌시려고 이렇게 느긋하신 거예요. 저 곧 수업이란 말이에요.”

 

 “네 수업이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하나도 바쁜 거 없으니까 하나하나 보면서 천천히 정리할 거야.”

 

 “그래도. 저 오늘 연습도 있어서 늦는데 혼자서 어떻게 다 정리하시려고요. 무거운 짐도 꽤 되는 것 같던데.”

 

 카게야마의 말에 코웃음을 친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그의 뒷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이면서 말했다.

 

 “나 너 다시 만나기 전까지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거든? 저게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과보호하지 마, 토비오 쨩. 네가 이와쨩이야? 누가 누굴 애로 보고 있어.”

 

 오이카와의 핀잔에 카게야마가 머쓱하단 듯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오이카와가 내미는 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문득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다시 만나기로 결정했을 때 고민하다가 반지를 가져다주었더니 카게야마가 지었던 믿을 수 없단 표정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체 토비오 쨩의 머릿속에서 나는 어떤 이미지인 걸까. 오이카와는 저 예측할 수 없는 머릿속이 궁금하다고 생각하며 카게야마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 얼른 수업 들으러 가. 아무리 머리가 나쁜 학생이라고 해도 수업 시간에 늦으면 안 되잖아.”

 

 “그래도 성적은 나름 괜찮게 나오는데요.”

 

 “뭐라고? 오이카와 씨 성적표가 궁금하다고? 한 번 가지고 와서 토비오 쨩 거랑 비교해 볼까?”

 

 “다녀오겠습니다.”

 

 입술을 비죽 내민 카게야마가 수건을 팔걸이에 걸곤 소파에 기대어 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곤 키득거리다가 그를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신발을 신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늘 차 조심하면서 다니고 수업 잘 듣고 와.”

 

 “. 오이카와 씨도 밥 잘 챙겨 드시고 계세요.”

 

 카게야마가 뒤를 힐끔 쳐다보고 나갈 때까지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기지개를 켜고는 등을 돌려 집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좋아, 얼른 끝내고 쉬자!”

 

 짐 정리를 끝내고 청소까지 한 오이카와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곤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소파에 앉았다. 사실 카게야마를 내보내면서 오이카와는 혼자서 어떻게 저 많은 상자들을 정리하나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기분이 좋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단 게 이런 기분인가. 그는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남아 있던 감정들도 전부 다 정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개운함에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맡기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내친김에 발도 쭉 뻗어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는데 무언가가 발끝에서 툭 하고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 뭐지?”

 

 혹시 뭔가 빼먹은 물건인가 싶어 오이카와는 방금 건드린 물건을 테이블 밑에서 꺼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오이카와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온 클리어 파일을 돌려보다 내용물을 보았다. 카게야마의 훈련 스케줄인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잠시 정리정돈을 잘 못 하는 카게야마를 떠올리곤 고개를 젓다가 오늘은 무슨 훈련을 하는지 캘린더가 프린트된 종이를 보았다.

 

 “K대랑 연습시합이라. 그 팀에 누가 있었더라.”

 

 오이카와는 서류를 빤히 내려다보다 그대로 종이를 손에 쥔 채로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떻게 할까. 그는 경기를 보고도 자신이 코트 위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단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오이카와는 잠깐 어두운 방에서 아무것도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 자며 자신의 운명을 비관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다 돌연 카게야마의 얼굴이 생각났다.

 

 “내가 가면 분명히 놀라겠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물을 카게야마가 떠오르자 가라앉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일단 부딪혀 보자. 오이카와는 서류에서 경기장이 어딘지 확인하고는 겉옷과 키를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간만에 토비오가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체크나 해봐야지. 오이카와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따가운 햇볕에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다 뒤를 돌아 집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이 닫힐 때까지 어두운 방을 바라보다 직감했다.

 

이 계절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 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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