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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오이] 이 계절이 지나면, 中

*전편

 

 

***

 

 

 잠을 설치는 바람에 눈이 퀭한 채로 카페에 나타난 오이카와를 보고 매니저는 걱정해 주었다. 그는 그녀를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매니저의 눈을 피해 깊게 한숨을 내쉰 오이카와는 앞치마를 다시 묶고는 카운터 부근을 정리하다가 딸랑이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며 습관적으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

 

 젠장. 무심코 욕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 했지만 진상 손님들에게 단련된 덕분인지 어느새 가까이 온 후배의 얼굴에다 욕을 내뱉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표정 관리가 안 돼 애매한 표정을 짓던 오이카와는 단번에 카게야마가 입고 있는 코트를 알아보곤 얼굴을 더 굳혔다. 저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에 관심이 없는 건 매한가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오이카와는 포스기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오이카와 선배.”

 

 “주문하시겠습니까.”

 

 “오이카와 씨.”

 

 “주문 안 하실 거면 이따가 오세요.”

 

 “바닐라 라떼 한 잔이요.”

 

 “따뜻한 거로 드릴까요.”

 

 “아뇨, 시원한 거로 주세요.”

 

 오이카와는 눈앞으로 내밀어지는 카드를 받고 계산을 한 뒤에 최대한 손이 스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카드를 건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드리겠습니다.”

 

 숨이 막힌다, 라는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에 익숙하게 만들던 바닐라 라떼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헷갈려 몇 번이나 멈추면서 만들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로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잘 지냈어요?”

 

 “시럽이랑 빨대는 저쪽에 있습니다.”

 

 “저 좀 봐주세요, 오이카와 씨.”

 

 “손님, 업무 중이니 사적인 얘긴 나중에 해주시죠.”

 

 카게야마가 생각보다 끈질기게 굴자 오이카와는 애써 떨리는 눈을 카게야마에게 고정시키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입구의 종이 울리며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들고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이카와는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곤 손님을 응대했다.

 

 그는 일하는 와중에도 몇 시간 째 같은 자리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카게야마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신경 쓰였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차라리 일이 안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카게야마가 앉은 테이블에 놓인 세 개의 빈 컵을 노려보았다. 몇 분 뒤면 퇴근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머그잔을 씻으면서 계획을 짰다. 옷을 갈아입고 재빨리 카페를 뛰쳐나갈까.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다리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면 좋지. 그는 초조해지자 습관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교대 시간이 되었는데도 앞치마를 안 벗고 버티고 있는 오이카와를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건 지난 2년으로도 충분했다. 오이카와는 시합 전에 긴장이 되었을 때 떠올리던 것들을 생각하며 스태프 룸을 나섰다. 피할 수 없다면 정정당당하게 나가는 수밖에.

 

 

 

 

***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빈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컵들을 카운터에 가져다주곤 문밖에서 오이카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가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오이카와 씨.”

 

 그는 오이카와의 팔을 잡으려다가 어제처럼 내쳐지는 것이 두려워 그냥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오이카와가 흠칫거리며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잠시 카게야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따라오라는 듯이 고갯짓으로 길을 가리켰다.

 

 “무슨 볼일인데. 이미 끝난 사이에 더 이상 할 말도 없지 않아?”

 

 오이카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걷고 있던 카게야마는 갑자기 들린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오이카와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 꿈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지금 그게 궁금해서 날 그렇게 기다린 거야?”

 

 “…….”

 

 “, . 잘 못 지냈을 것 같아? 보다시피 나는 너무 잘 지내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찾아오지 말아 줄래? 방해되니까.”

 

 “후유증은 오래 간다던데, 무릎은 좀 괜찮아요?”

 

 “너랑은 이제 상관없는 일이잖아. 신경 끄고 넌 네 갈 길이나 가. 나도 내 갈 길 알아서 잘 찾아갈 테니까. 잘 가, 다신 보지 말자.”

 

 오이카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등을 보였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 말과 행동에 오이카와의 미래엔 더 이상 자신이 없을 거란 걸 실감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헤어진 건 반 년 전인데 이제 와서야 그런 기분이 들다니. 카게야마는 인파 속에 묻혀 멀어지는 오이카와의 뒤통수를 보며 공황에 빠지는 것 같았다. 마치 중고등학교 때 영원히 그를 잡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강렬한 어지럼증에 시야가 흐려졌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재작년에 오이카와가 사고로 배구를 관뒀을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이 상실감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다.

 

 “싫어요.”

 

 카게야마는 재빠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오이카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몇몇 사람들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를 번갈아 쳐다보다 곧 다시 고개를 돌리곤 지나쳤다. 오이카와는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오이카와 씨.”

 

 “대체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그 때 분명하게 끝냈잖아, 우리. 네가 그만하자며.”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잘못한 게 대체 뭔데!”

 

 오이카와가 거칠게 카게야마의 손을 뿌리치면서 카게야마를 향해 몸을 돌리곤 그를 노려보았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도 지금도 왜 자꾸 네가 사과하는 건데? 잘못한 건 나잖아! 다 나 때문이었잖아! 근데 왜 네가!”

 

 “제가! 제가 좀 더 어른스러웠다면 그때보단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한 번씩은 힐끔거리면서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그 시선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제가 밥 살 테니까 자리 옮겨요.”

 

 “싫어. 내가 왜.”

 

 그는 아까보다 기세가 수그러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예전에 가끔 써먹었던 수법을 떠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게야마가 그 방법을 쓸 때마다 오이카와가 부탁을 들어주었기에 종종 써먹었던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예전처럼 오이카와의 손을 잡으려다 지금의 관계를 떠올리고는 그가 입은 카디건의 소매를 슬쩍 잡고 최대한 불쌍해 보일 것 같은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저 오이카와 씨 보겠다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배고파요. 그리고 기다리면서 커피도 세 잔이나 마셨더니 속도 쓰린 것 같은데.”

 

 카게야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오이카와를 흘깃 쳐다보았다. 곧 오이카와가 한숨을 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말했다.

 

 “앞장 서. 맛없으면 가만히 안 둘 줄 알아.”

 

 그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카게야마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고는 자주 가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옆에 서는 게 어색해서인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보다 두어 발자국 뒤에서 걸어왔다. 나란히 걸으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는 너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저번에 조별과제 때문에 갔던 곳인데 오이카와 씨도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카게야마는 슬쩍 속도를 늦춰 툴툴거리는 오이카와의 옆에서 같이 발걸음을 맞추면서 걸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니 옛날에 같이 다녔을 때가 떠올라 카게야마는 잠시 씁쓸해졌다. 고작 몇 년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 버려 종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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